장호왕곱창의 김치찌개

겨울의 중심에서 북극 한파가 몰아칠 때는 고춧가루 팍팍 넣고 얼큰하게 끓여낸 김치찌개가 제격이다. 숟가락으로 국물 한 입 털어 넣고, 흐물흐물해진 묵은 김치 한 줄기에 통통한 돼지고기 목살 한 점을 말아 꼭꼭 씹어 먹을 때의 느낌이란! 이 맛있게 매운 쾌감은 전 세계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한국인 고유의 희열이라 자신할 수 있다. 

덕분에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노포 중에는 이름난 김치찌개 집이 많다. 그 중에서도 오늘 소개하는 서울 서소문 ‘장호왕곱창’은 1980년 문을 연 이래 41년간 넥타이 부대의의 사랑을 받아온 집이다. 소 곱창이 메인 음식이지만, 김치찌개 맛집으로 소문난 것도 독특하지만, 시간이 멈춘 듯한 실내 풍경이야말로 좀처럼 볼 수 없는 진귀한 장면이다. 중년 세대라면 흘러간 시대의 향수를, 젊은 세대라면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식문화를 접할 수 있다. 벽면에 붙은 빛바랜 술 광고 포스터 속에선 지금은 어엿한 엄마가 된 배우 전지현의 리즈 시절 얼굴도 볼 수 있다.  

고가도로 밑 허름한 15평짜리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면 추억의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드럼통 원형탁자가 빼곡하다. 사이사이 놓인 의자는 또 얼마나 다닥다닥 붙어 있는지 네 사람이 앉으면 절로 어깨가 맞닿는다. 그래도 손님들은 불평 한 마디 없다. 오전 11시 30분부터 길게 늘어서는 줄 때문에 탁자 하나를 잡고 앉았다는 것만으로 감지덕지. 하지만 이 같은 풍경은 코로나19시대를 맞아 많이 달라지긴 했다. 

점심시간엔 소 내장 부위를 삶은 메뉴 ‘짤라’와 김치찌개가 전부라 메뉴 선택권마저 없지만,  이 역시 불만의 요소는 못 된다. 전국에 소문난 장호왕곱창의 명성은 바로 이걸 먹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들의 입소문으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사실 ‘짤라’와 김치찌개는 상차림부터 완벽한 세트다. 묵은 김치, 돼지고기, 두부를 담은 누런 양은냄비가 테이블 위 불판에 오르면 아주머니는 손잡이 꼭지를 떼버린 냄비 뚜껑을 덮고 그 위에 ‘짤라’를 닮은 접시와 된장, 마늘, 소금을 담은 스테인리스 스틸 쟁반을 얹는다. 냄비 옆에는 앞 접시, 김치, 콩나물무침, 단무지, 밥 그릇, 물 대접, 소주잔, 소주병, 수저가 레고 블록처럼 차곡차곡 자리를 잡는다. 아주머니의 치밀하게 계산된 익숙한 손놀림에선 가뜩이나 좁은 테이블 위 한 치의 공간도 허투루 쓸 수 없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꼭지가 빠진 냄비 뚜껑의 작은 구멍으로 새어나오는 후끈한 증기는 작은 쟁반을 따뜻하게 덥히는 효과를 내니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상차림이다.  

소주병이 빌 때쯤 ‘짤라’ 고기 접시도 빈다. 이제 냄비 뚜껑을 열고 라면 사리를 넣을 차례인데, 이 때의 모습을 보면 장호왕곱창을 처음 찾은 손님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테이블 옆 벽에는 냅킨이 담긴 작은 플라스틱 바구니가 걸려 있고, 그 위에 라면 봉지가 하나씩 올려 있다. 이곳을 처음 찾는 손님이라면 당연히 바구니 위 라면봉지에 손이 간다. 으레 라면 사리를 시킬 줄 알고 미리 미리 테이블 옆에 봉지 하나씩 비치해둔 사장님의 센스를 칭찬하면서 말이다. 그 순간 아주머니의 호통이 들린다. “그거 손대지 말고 라면 사리 필요하면 따로 달라고 하세요.” 이 집에서 라면은 김치찌개에 넣고 먹는 사리용, 한없이 가벼워서 팔락대는 냅킨을 살포시 눌러놓는 문진용 두 가지 쓰임이 있다. 

숟가락 가득 가득 두부, 김치, 고기 삼층탑을 쌓아 먹어도 좋을 만큼 기본 양은 넉넉하다. 칼칼한 찌개국물에 소주 한 병 더 비우고 싶다면 고기 추가를 시켜도 좋다. 가격은 김치찌개 1인분 8000원, 짤라 1만원.  

서정민 기자/중앙 컬처&라이프스타일랩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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