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6월과 10월 두차례에 걸쳐 정주영이 소떼를 몰고 휴전선을 넘어 북한을 방문한 사건이 있었다. 총 1001마리를 데리고 넘었다. 당시 83세의 정주영 회장은 1차로 트럭 50대에 500마리의 소떼를 싣고 판문점을 넘었다. 소떼 몰고 이북으로 간 사건은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미국의 CNN도 이 소떼 몰고 넘어가는 장면을 화면으로 보도하였다. 세계적인 토픽이 되었던 것이다. 굉장히 토속적이면서도 세계인들에게 볼 거리를 제공하였고, 거기에 함축된 의미도 깊었다. 그 철옹성 같던 휴전선을 뚫었다는 의미였다. 

한국 사람들은 지난 수천년 동안 ‘쌀밥에 쇠고기국’이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었다. 쇠고기국을 끓일수 있는 소야 말로 가축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가장 맛있고, 가장 영양가가 풍부한 고기는 쇠고기로 여겼다. 소를 몇 마리 가지고 있는가가 부의 척도이기도 하였다. 중국은 돼지고기를 쳐 주지만 한국은 쇠고기를 쳐 준다. 이는 중국의 소 보다도 한국의 소가 훨씬 맛있고 육질이 좋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가축은 ‘소’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정주영은 어떻게 소떼를 몰고 휴전선을 넘어갈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언뜻 생각하면 쉬운 아이디어 같기도 하지만 종합적으로 생각하면 이건 매우 심도 있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종교적이고 영적인 의미가 내포되었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종교적이고 영적이란 말인가? 휴전선 일대에는 수많은 귀신들이 쩔어 있는 지역이다. 6.25때 10여개국 넘는 다국적 군대가 이 일대에서 사망하였다. 

UN 창설 이후로 한국전쟁처럼 많은 나라의 군대가 참여한 것은 처음이었다. 십몇개국 되지 않던가. 유엔이 참여한 이후의 전쟁에서 10여개국 이상의 군대가 참여한 전쟁은 없었다. 6.25가 유일하다. 다국적 군대의 귀신들이 스크럼을 짜고 모여 있는 휴전선은 어지간한 파워로는 돌파하기 힘든 지역이었다. 귀신들이 실드 친 방탄지대였다고나 할까. 이걸 힘이 쎈 소떼들이 돌파하였다. 천마리가 넘는 1001마리의 소떼들이 소뿔로 들이 받고 넘어 갔다. 한번 구멍을 내 놓으면 그다음에는 쉬운 법이다. 처음 구멍 내기가 힘들다. 처음 구멍을 힘이 쎈 소떼들이 소 뿔로 냈던 사건이 정주영의 소떼 방북 사건이다. 

1998년 당시에 서울에는 40대 중반의 민도사가 전성기를 구가할 때였다. 민도사는 우선 풍채가 좋았다. 사람을 볼 때 신언서판(身言書判)이다. 얼굴이 잘생기고 키가 적당하면 점수를 따고 들어간다. 딱 보았을 때 얼굴에 구질구질한 느낌이 없다. 미남에다가 학구적인 아우라를 풍기는 인상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흔히 사주팔자 보는 역술가들에게 풍기는 때 묻은 구질구질이 없었다. 이게 큰 장점이었다. 민 도사의 또 하나 장점은 한문에 어느 정도 조예가 있다는 점이었다. 한국 사람은 한문을 잘 하면 존중을 해 주는 분위기가 있다. ‘아, 이 사람 뼈대가 있는 집안 출신이구나!’. ‘학구적이면서 깊이가 있는 사람이구나!’하는 느낌을 상대방에게 준다. 실제로 한문을 어느 정도 할려면 뼈대도 있어야 하고 윗대 어른 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도 있어야 한다. 

민도사는 나를 처음 보았을 때 갑자기 손을 내어 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조 선생 그 손 좀 내놔 보시오?” “아니 왜 그래요” “그 냥 좀 내놔 봐. 내가 써 줄게 있어”. 둘이 밥을 먹다가 오른손 손바닥을 편채로 민도사에게 내 놓았더니 민 도사는 안 주머니에 가지고 다니던 검정색 싸인펜을 꺼냈다. 그 싸인펜으로 오른손 손바닥에 한문으로 열댓자를 연달아 쓰는게 아닌가. 그 문구는 한시 같기도 하였다. 외워서 쓰는 내용이 아니고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생각나서 쓰는 문구였다. 내용인 즉슨 ‘문창성(文昌星)이 떠 있고, 그 문창성의 기운을 지금 받고 있는 인물이다’하는 것이었다. 내가 볼 때 ‘이건 영발로 쓰는 문구이구나. 인공위성에서 누가 불러주니까 줄줄 나오는 문구이다’라고 생각하였다. 

90년대 후반에 서울에서 날리던 민도사의 소문을 정주영 회장도 들었다. “그 친구 한번 만나 봐야 하겠구만”. 정주영은 원래 도사를 그렇게 신뢰하거나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본인이 거의 도사였다. 정주영이 생긴 외모는 투박스럽게 생긴 사람이었지만 머리 돌아가는 것은 거의 번갯불 급이었다. 척 보면 딱이다. 눈치도 빠르고 상대방의 마음을 꿰뚫는 독심술도 발달한 사람이었다. 거기에다가 사업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기꾼과 구렁이, 여우를 상대해 봤겠는가. 수많은 시행착오를 하면서 여기까지 올라온 재벌 오너는 도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대방이 문 열고 들어오는 걸음걸이만 보아도 ‘저 사람은 믿을만 하다. 아니면 사기꾼 같다’하는 직관이 들어오는 사람이다. 점쟁이가 따로 없다. 그 동안 축적된 수많은 데이터와 본인이 타고난 특유의 직관력이 결합한 결과이다. 사실 재벌 창업자 정도 되려면 이정도 직관력 내지는 신기(神氣)가 없으면 사업 못한다. 중간에 벌써 꺼꾸러 졌다. 정주영이 1915년 생이니까 1998년이면 팔십 서너살 무렵이다. 이미 산전수전, 공중전, 사막전 까지 다 겪은 상태의 나이였다. 자신이 이미 도사인데 어지간한 도사 만나보아야 눈 아래로 내려다 보기 쉽다. ‘이거 서푼짜리가 내 앞에서 까불고 있네’하는 심정 아니었을까. 

사판(事判)에서 엄청난 도를 닦아 이미 도사급 반열에 돌라선 80대의 정주영을 앞에두고 40대 중반의 민도사가 마주 앉았다. 반열에 올라간 인간들은 서로 마주 앉았을 때 느낌이 온다. ‘이거 만만치 않다’ 라든가, ‘이거 해 볼만 하겠는데’ 라든가, ‘아니 이거 밴텀급인줄 알았는데 라이트 헤비급의 기운이 느껴지네’하는 감(感)이다. 정주영은 이미 힘이 빠진 80대이긴 했지만 원체 타고난 정력이 절륜해서 아직도 파워를 행사하고 있었다. 그 파워를 굳이 표현해보자면 회오리 바람이라고나 할까. 정주영은 회오리 치는 기운을 타고 났다. 회오리의 특징은 상대방을 자기 페이스로 몰고 오는 힘이다. 정주영과 이야기하다보면 웬지 모르게 정주영 화법에 말려든다. 회오리로 일단 끌어온 다음에 돌려 버린다. 몇바퀴 돌다 보면 자기 리듬이 깨진다. 어느덧 정주영 하자는 대로 ‘예,예’하면서 제압당해 버리는 것이다. 

회오리 장풍의 정주영 앞에 마주 앉은 40대의 민도사는 ‘장창(長槍)’ 주특기였다. 길다란 창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 전국시대의 전투를 보니까 전투 부대의 제일 앞에는 장창 부대가 배치되는게 공식이었다. 장창이라 하면 기본적으로 4미터가 넘는다. 길면 5미터도 된다. 이 장창으로 상대방의 진영을 찔러 버리는 것이다. 진영을 흝어 버리는데는 장창이 최고이다. 이는 서양의 고대 전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장창이 1번이다. 견고하게 짜 놓은 네모진 방진(方陣) 또는 원진(圓陣)을 깨는데는 장창이 효과적이다. 

80대의 노련한 회오리 장풍과 40대의 장창이 마주 앉았을 때 거기서 전해져 오는 압력도 상당하였다. 바둑의 고수 이세돌과 중국의 고수 칭하오가 번기 바둑을 둘 때 옆에서 관전하다 보면 두 사람의 기운이 팽팽하게 격돌한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도 고기압과 같은 팽팽한 압력감을 감지한다는 이야기를 바둑 고수들한테 들은 바가 있다. 

정주영과 민도사도 그랬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장창이 회오리 장풍을 뚫어 버렸다. “회장님. 회장님은 강력한 기운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아직 그 에너지를 더 쓸수 있습니다. 회장님 에너지로 38선을 뚫어야 합니다. 38선에는 귀신들이 꽉 짜고 있지만 회장님이 이걸 뚫어야 합니다. 뚫을 사람은 회장님 뿐입니다.” 민도사가 구사한 초식은 이런 것이었다. 

정주영에게는 엄청난 뽐쁘질이었다. 38선(휴전선)에 뭉쳐 있는 귀신의 방어막을 당신 만이 뚫을수 있다는 민도사의 장창에 정주영은 제대로 찔려 버렸다. 이 말에 뿅 간 셈이다. 그도 그럴것이 정주영의 머릿속에서는 이 말을 듣고 아이템 하나가 번갯불처럼 떠 올랐다. ‘그렇다. 소를 몰고 가자! 소떼를 몰고 그 귀신벽을 뚫으면 되지. 소는 머리에 뿔이 있자나!’  정주영이 소를 연상하게 된 계기도 있다. 이북에서 남한으로 피난올 때 소1마리를 가지고 왔다. 그래서 충청도 서산 농장에 이미 소떼들을 키우고 있던 상태였다. 

정주영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본전은 소 1마리라고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이미 평소 머릿속에 소가 입력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상태에서 귀신 방어막을 뚫을 강력한 도구가 뭘까를 생각하다 보니까 1초내에 ‘소떼를 몰고 가자’는 아이디어가 불꽃처럼 솟아 올랐다. 이렇게 해서 정주영은 소떼를 몰고 휴전선을 넘었다. 귀신들이 방어막을 뚫었다. 민도사의 영발 아이디어를 접수해서 자신의 영발 아이디어를 합친 결과물이 소떼 방북이었다. 

정주영은 민도사에게 거금의 복채를 냈다고 전해진다. 나는 그 액수가 얼마인지 궁금해서 민도사에게 ‘얼마 받았었냐?’고 여러번 캐물었지만,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 세무조사 당할까봐 답변을 하지 않는 것인가? 내 짐작에 아마도 10억정도 받지 않았을까 추측되기도 한다.

조용헌(강호동양학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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