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오동일엽락 천하진지추(梧桐一葉落 天下盡知秋)라고 했다. 오동나무 이파리 하나가 떨어지니 세상 사람들이 가을이 온 줄로 안다는 말이다. 청나라 강희제(1654~1722) 때 왕희 등이 지은《광군방보》(廣群芳譜)에 실린 해설이다. 이 책은 《시경·회남자》등에 언급된 내용을 참고하여 꽃·풀·채소 등 식물계를 논하고 있다. 신선 세계에 산다는 나무 삼주수(三珠樹)에 관한 설명도 있다. 책 제목에 붙은 방(芳)은 꽃다울 방이다. 이 꽃잎들이 지는 계절이 가을이다. 낙엽 지는 소리도 뚜럭거리고, 마른 바닥에 굴러가는 소리도 스럭거린다. 이런 계절이 오면 생각이 깊어지고 머리가 수그러진다. 묵직해진 머릿속에는 고향 언저리에 서 있는 천년 보호수가 아롱지고, 그 동구 밖에 서 계시는 듯한 부모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런 절기에 흥얼거려지는 노래가 유주용이 절창을 한 <부모>다. 소월 김정식(1902~1934, 평북 구성 출생)의 시에 가락을 걸친 효곡(孝曲)이다. 이 노래는 1969년 코미디언 서영춘(1928~1986)의 친형 서영은(1924~1989) 작곡으로 신세기레코드에서 출반했다.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엄니 얘기를 듣고 있는가~.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질 때/ 겨울에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 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리라//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질 때 /겨울에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 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리라.(가사 전문)

노랫말이 거무룩한 수묵화처럼 눈에 그려진다. 우수수 낙엽 떨어지는 밤, 어머님하고 아들이 마주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모습이 완자창에 그림자로 비취는 듯한 서정이다. <부모>는 독일계 혼혈가수 유주용이 원곡 가수다. 발표 당시 30세이던 유주용은 1939년 강릉에서 출생하였으며, 공학박사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미 8군무대에서 함께 노래했던 위키리·최희준·박형준 등과 1963년 포클로버스(Four Clovers)를 결성해 활동했다. 그 시절은 사각모를 쓴 가수가 많지 않던 시절이고, 우리 유행가 100년사에서 트로트라는 장르가 한 물결의 강을 이루던 때다. 1953년 오픈한 최초의 음악감상실 세시봉도 활활거릴 때였다. 이들이 인기를 누린 이유는 서울 법대·서울 문리대·외국어대·서라벌예술대에서 상아탑(象牙塔)을 쌓은 이력도 한 몫 했으리라.

소월 김정식은 왜 <부모> 시를 썼을까. 소월은 3세경부터 14세에 할아버지 친구 손녀 홍단실과 결혼할 때까지 조부 슬하에서 작은어머니의 보살핌 아래 성장했다. 고향 근처 철도 부설공사에 동원되었다가 일본인에게 구타당해 정신병자가 된 아버지로 인한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이었다. 이때 소월이 사랑하던 여인은 3세 연상, 오순이란 아가씨였다. 오순이란 여인은 19세에 다른 사람과 결혼해다가 21세에 남편에게 구박받아 저세상으로 먼저 갔다. 소월이 읊은 <진달래꽃>·<초혼> 등의 시 속의 상대방이 이 여인임을 깨달으면 소월의 시가 더욱 애잔하게 음유된다. 소월의 본관은 공주(公州), 1902년 평안북도 구성에서 출생했다. 그는 불운의 묵객(墨客)이었다. 결혼 후에 일본 유학을 가지만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중간에 귀국한다. 고향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경영했지만 이 사업도 실패하고, 정신질환 등 피폐한 삶을 이어오다가 1934년 33세 음독(飮毒)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래서 <부모> 노랫말(시) 속의 어머니는 직설적으로는 소월의 숙모(叔母)일 것이고, 은유적으로는 소월이 마음속에 사무친 어머니가 아닐까 싶다. 이런 면에 관점을 두고 이 노래를 음유하거나, 시를 읊조리면 독자들은 또 다른 감흥에 젖을 수 있으리라. 대중가요로 작곡되어 불린 소월 시는 모두 50여 편, 소월 시로 노래한 가수는 원곡·리메이크 가수를 포함해 320여 명이란다. 소월 시를 재료로 곡을 가장 많이 만든 이는 작곡가 서영은이고, 소월 시를 가장 많이 노래 부른 가수는 최희준이다. 이 소월 시의 백미(白眉) <진달래꽃>이 1956년 박재란의 목청에 걸려 세상에 울려 퍼졌다는 기록은 있는데, 음원을 찾기가 어려워 아쉽다. 이 노래가 사실상 한국대중가요100년사에 걸린 시 노래의 서단(緖端)이 아니련가.

김소월의 시는 한국 서정시의 정수(正首)다. 그의 시, 영혼을 울리는 시어(詩語)에 멜로디를 입힌 곡은 <개여울>·<진달래꽃>·<산유화>·<길>·<님의 노래>·<님에게>·<맘속의 사람>·<눈물이 쉬루르 흘러납니다>·<하얀 달의 노래>·<그 사람에게>·<초혼>·<풀따기>·<자전차>·<님의 말씀>·<기억, 깊고 깊은 언약>·<부모> 등 대중가요와 가곡이 있다. 이 중에서 다른 가수가 가장 많이 리메이커 한 곡 중의 하나가 <부모>다. 윤항기·김세환·홍민·양희은·홍세아·박일남·이택림·심연희·박인희·이수미·이은하·김준이·유지성·문주란·남궁옥분·이청하·서영우·백승태·박현빈·이병기·조영남 등이다.

유주용과 뮤지컬 배우 겸 가수 윤복희의 만남과 이별 사연도 대중가요계가 품고 있는 흐릿한 숨은 그림이다. 윤복희의 인생은 1960년대 초반 세계적인 재즈뮤지션 루이 암스트롱(1901~1971)을 만나면서부터 개벽(開闢)을 한다. 그녀는 1963년 우리나라에 온 암스트롱 앞에서 그의 노래를 흉내 냈고, 이를 계기로 워커힐극장 개관공연에서 그와 같이 듀엣으로 노래를 불렀다. 이어서 1963년 필리핀 마닐라 공연도 가고, 1964년에는 싱가포르에서 코리안키튼스(윤복희·서미선·김미자·이정자)를 결성하여 1965년 영국 BBC 투나잇쇼에 출연했다. 이후 미국, 1966년엔 베트남전 미군 위문공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미국 생활을 하다가 1967년 1월, 일시 귀국을 했을 때 유주용으로부터 약혼반지를 건네받게 되어, 1968년 유주용과 결혼을 한다. 그들은 결혼생활을 채 5년을 넘기지 못하고 파경에 이르렀다. 유주용의 누나 모니카유도 가수였으며, 매형은 클라리넷 연주자 엄토미(본명 엄재욱. 1922~2002)로 영화배우 엄앵란의 친척이다. 유주용은 첫 부인 윤복희와 이혼의 아픔을 겪었으며, 이후 나니김(Nannie Kim)과 재혼을 하여 미국에서 살고 있다.

<부모> 노래에 곡을 붙인 서영은 집안은 대를 이어가는 연예 가문이다. 그는 4형제다. 장남 서영은은 작곡가·둘째 서영춘은 1960년대 흑백 TV 속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의 웃음을 제작한 코미디언·3~4남 서영수와 서영환은 무궁화악극단 단원이었다. 서영은의 장녀 서지숙도 1971년 밴드 조커스와 <경부선 고속도로>를 부르며 활동한 가수다. 문밖에 낙엽 뒹구는 소리가 서걱거린다. 멀리서 어머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온다. 아~ 그리운 어머니.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유행가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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