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잊혀진 듯하지만 지워져 간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가슴팍에 도사리고 있는 추억과 기억이 그 증거다. 이러한 가슴팍의 똬리를 유행가로 얽은 곡조가 이용의 목청을 통하여 세상에 나온 <잊혀진 계절>이다. 10월이 오면 우리는 이 노래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10월의 마지막 날, 이 노래를 애곡(哀曲)해야 한다. 이 노래는 작사가 박건호(1949~2007)가 자신의 실연사(失戀事),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스토리를 모티브로 한 절창이다. 1980년 9월 가을비가 내리는 어느 날 술을 잘하지 못하는 박건호가 어느 여인과 포장마차에 마주 앉아 소주 1병을 마셔버렸다. 31세의 노래시인 박건호가 연인이던 그녀와의 이별 자리였다. 언제부턴가 그녀와의 자리가 부담스러워질 무렵, 그녀를 더 편안하게 보내기 위하여 술을 더 마셔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날 이별을 고한 것, 이 노래는 전형적인 실패한 사랑의 발라드 허물어진 로망을 얽은 유행가다. 이 곡은 원곡 가수 이용이 생라이브 공연장에서 8000여 회를 내지른 절창이다. 10월이 오면 가수 이용은 승용차·퀵 바이크·비행기를 타고 땅과 하늘을 날아다니듯 행사장을 오간다. 행여나 잃어버릴지도 모를 그날의 기억을 다시 보다듬기 위하여~.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어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올려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가사 전문)

축축하던 그날, 컴컴한 어둠 속에서 몸을 잘 가누지 못할 만큼 취한 박건호를 버스에 태워주면서‘이분 흑석동 종점에 내리게 해주세요’라고 한 그녀는 누구였을까. 우리 대중가요 100년사가 안고 있는 숙제다. 그녀가 버스 안내양(1961년에 도입하여 1990년대 폐지됨)에게 부탁했지만, 박건호는 다음 정거장에서 바로 내려버렸다. 그리고 다시 버스가 온 길을 향하여 뒤돌아 달렸다. 그리고 동대문에서 창신동으로 가는 중간지점에서 우산을 받쳐 들고 걸어가는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리고는 목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기도 전에‘정아씨, 사랑해요’라고 한마디를 하고서 다시 동대문 쪽 오던 길을 향하여 달렸다. 그날이 9월 마지막 날이었단다.

그래서 원래 이 노래 첫 소절은 ‘9월의 마지막 밤을~’이었으나, 노래 발표가 늦어져 ‘10월의 마지막 밤’으로 수정되었고, 그 당시 무명 가수 이용을 인기반열에 올려놓는다. 이 노래는 원래 조영남의 노래였단다. 원래 다장조의 높은 곡이었고, 조영남이 마지막에 믹스 다운작업만 남겨놓은 상태에서 계약이 성사되지 않아 이용에게로 온 것이란다. 울림과 떨림의 열창으로 <잊혀진 계절>을 세상에 처음으로 내어놓던 날, 이용의 나이는 24세였다. 그는 1957년 수원에서 출생하여 서울 휘문고·서울예대·네덜란드 델포트대와 미국 템플대 작곡과를 졸업하였으며, 1981년 국풍81에 <바람이려오>를 불러 금상을 수상하며 데뷔하였다. 국풍81은 1981년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전두환 정부가 민족문화예술의 계승과 대학생들의 국악(국학)에 대한 관심 고취라는 명분 아래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주최한 관제적 성격의 문화축제였다.

그 시절 3S 정책의 일환, 스크린·스포츠·섹스로 국민 관심을 모아가려던 의도였다. 전형적인 서울의봄에 매달린 국책이었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도 이런 시대적인 흐름에 태워진 돛단배들이다. 이용은 전영록·이치현·강인원·김수철과 음악학원 동기이고, 손석희·송승환과는 휘문고 동창이다. 1982년 이용은 조용필의 아성을 넘어 MBC 10대가수상 가수왕을 차지한다. 이때 조용필의 존재감은 1:100으로 표현해도 될 만큼 독보적이었다. 당시 조용필은 <못 찾겠다 꾀꼬리>·<비련>·<자존심> 등을 히트시키면서 인기 정상을 지켰고, 조용필의 팬들은 이용의 추격과 추월에 대하여 분통을 터뜨렸었다. 인생만사는 3추, 추격·추월·추락의 연속이다. 이 노래는 1984년 <잊혀진 계절>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이용이 출연하였다. 이용의 아버지는 사관학교 출신으로 직업군인이었으나, 이용이 인기가수로 데뷔한 몇 해 뒤 유명을 달리했다. 이용의 아들 이욱은 미국 시민권자이지만 한국 국방부 군악대대에서 현역으로 복무를 마쳤다.

작사가 박건호는 원래 순수문학 시인이었다. 그는 1949년 원주에서 태어나 20세에 시인 미당 서정주(1915~2000)가 발문(跋文)을 써 준 시집 《영원의 디딤돌》을 발간하였으며, 1972년 이해인(본명, 이명숙) 수녀와 풍문여중 동창인 박인희(본명, 박춘호)의 <모닥불> 가사를 쓰면서 작사가의 길로 들어선다. 그는 2007년 12월 유명을 달리할 때까지 3천여 곡의 대중가요를 남겼다. <내 곁에 있어 주>·<아, 대한민국>·<빙글빙글>·<슬픈 인연>·<모나리자> 등이 대표곡이고, 시집 《타다가 남을 것들》·《고독은 하나의 사치였다》·《추억의 아랫목이 그립다》·《기다림이야 천년이 간들 어떠랴》·《그리운 것은 오래 전에 떠났다》등을 냈고, 《오선지 밖으로 튀어나온 이야기》라는 에세이집을 남겼다.

박건호의 대중가요 작사가 데뷔작 모티브인 <모닥불>은 조로아스터교의 종교의식 때 지피던 불과 같은 맥락으로 보아도 되겠다. 조로아스터교는 예언자 조로아스터(Zoroaster)의 가르침에 종교적·철학적 기반을 둔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를 믿는 고대 페르시아 종교이다. 한자로는 불을 숭배한다는 배화교(拜火敎), 중국에서는 관중 지방의 종교라는 의미의 현교(祆敎)라고 하여 삼이교(三夷敎)의 하나로 꼽혔다. 삼이교는 당나라 때 서방에서 유입된 이방의 세 종교를 말하는데, 조로아스터교·마니교·네스토리아교를 지칭한다. 불을 숭배하는 종교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불 자체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은 타오르는 불꽃이 놓인 제단 앞에서 제례를 행할 때, 제물이나 막대기 등에 불 냄새를 배이게 하여 경배를 표 한데서 유래한 것이란다.

조로아스터는 자라투스트라(BC 630~553)의 그리스식 발음이다. 자라투스트라를 세상에 제대로 알린 인물이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1844~1900)다.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으로 유명한 책,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속 화자다. 니체가 자신의 철학 운명애(運命愛)를 자라투스트라를 통하여 설파했고, 1896년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는 이 책에서 영감을 얻어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교향시를 발표했다. 이 속의 운명애을 모티브로 만든 우리 유행가가 김연자가 절창한 <아모르파티>다.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누구나 빈손으로 와 소설 같은 한 편의 얘기를 세상에 뿌리면 산다. 그렇다. 10월이 가기 전에 우리는 또 한 도막의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를 얽는다.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유행가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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