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의송 한일농업농촌문화연구소 대표
현의송 한일농업농촌문화연구소 대표

대표적인 일본요리의 하나인 스시는 신맛을 의미하는 형용사 스시(酸시)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한자로는 수(壽)사(司)를 써서 스시라고 읽는다. 1900년대 초 대지진으로 인해 동경의 스시장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정착하면서 에도마에스시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기스시(키壽司)에 붙여진 동경의 스시집 이름에 붙은 에도마에스시라는 지명이 보통명사처럼 전국에 퍼졌다.

스시는 기본적으로 맛이 담백한 흰 살 생선스시부터 시작해서 맛이 진한 붉은 살 생선이나 어패류 스시, 그리고 마지막으로 달걀말이 같은 마키스시 순으로 먹는 것이 스시 맛을 음미하기가 좋다고 해서 추천되는 순서가 되었다.  

초창기 초밥은 지금의 모습과는 다른 발효식품으로, 생선살을 밥에 묻어 발효시켜서 먹었다고 한다. 현재 일본에서 인정하는 초밥의 기원은 기원전 4세기 동남아의 메콩강 유역의 농경민족 사이에서 생선을 오래 보관할 목적으로 처음 발달해서 점차 동아시아쪽으로 옮겨왔다는 설이다. 그 기술이 나라시대(奈浪 710-794) 쌀농사의 도입과 함께 중국에서 일본으로 들어왔다.

이즈음에 스시는 단 식초를 친 쌀밥에 붕어 등의 물고기를 올려서 하루 밤 숙성시켜 `나래스시(熟지) `라고 불리는 보존식으로 먹게 되었다. 스시라는 이름은 시다라는 뜻의 일본어 슷파이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즉석에서 손으로 쥐어서 만들어 주는 니기리스시가 만들어 진 것은 1818년부터 1830년 사이로 추정된다.

현재의 초밥은 재료뿐 아니라 조미료의 선택, 쥐는 방법 등에서 장인정신이 십분 발휘되어 거의 예술의 경지에 달하는 위상에 오르게 되었다. 미슐랭가이드 별 장식을 한 초밥집들이 즐비할 정도가 되었다. 이런 이미지가 세계적으로 널리 퍼지면서 해외에서 초밥은 고급일본 요리의 대표 주자처럼 되었다.  

3대 째 계속되는 노포를 맡은 유이(油井)씨의 말은 언제나 솔직하다. 지점을 내지 않고, 점포 확장도 안하고, 닌교쬬에 뿌리를 내린 오직 한 점포의 맛을 지키기 위해서 고집스럽게 가족경영을 계속해 왔다. 현재 요리장에는 아들 2명과 부인이 함께 하고 있다. 신용의 끈으로 유지되고 있으므로 모두가 차분하게 수준 높고 세밀한 작업수행이 가능하다. 모두가 가슴에 명찰을 달고 일하고, 어떤 어려운 작업도 수용하며, 책임을 진다는 자세로 임한다. 그들의 손에 매일 매일의 일이 있고 기스시가 닌교쬬에서 선조로부터 전해오는 에도마에스시의 맛을 지키고 있는 것은 일본 장인의 미덕이 되고 있다.

기스시 4대 유이(油井)씨의 고객을 대하는 언행과 태도는 매우 겸손하고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고객과 나누는 이야기도 활발하고 부드럽다. 좋아하는 스시를 즐겁게 드시고 고객이 만족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그의 삶의 보람이라고 말한다. 지금은 동경의 스시집은 요리장에게 요리를 일임해서 마음대로 주라는 뜻의 `오마카세` 이지만 기스시는 유리 케이스 전시대에 진열된 생선종류를 보면서 자유롭게 주문하는 방식으로 주문하고 요리를 즐기는 것이 기스시만의 식문화다.

기스시를 오늘의 유명한 스시점으로 발전시킨 사람은 바로 4대 손 유이(油井)의 아버지 隆一씨 이다. 그는 동경의 스시명인 이라면 모두가 존경하는 부모와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어촌해안에서 젊은 사람들과 만나 아무리 바빠도 반드시 잠깐 멈추어 다정한 이야기를 나눈다. 어떤 상항에도 존재감이 있는 어른이었다. 스시를 만드는 기술은 물론이고 스시집을 경영하겠다는 젊은 장인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동경의 닌교쬬(人形町)에서 스시집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이렇게 유명하게 상호가 알려진 것도 隆一의 스시제조 기술과 그의 인품이 훌륭했기 때문이다. 닌교쬬가 유명해지고 동경에서 대표적인 환락가가 된 것도 기스시가 있어서다.

스시집을 계속 이어간다는 것은 선조들이 확립한 에도마에스시의 전통을 지키고 시대의 흐름이 변해도 폐업하지 않고 꾸준히 스시를 만드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 막연히 과거의 업을 계속하는 것만으로는 지키고 싶은 문화를 지킬 수 없다. 현재의 점주 유이씨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가업에 문제가 생겨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30세 때 가업을 인수했다. 입교대학을 졸업한 그는 대학졸업 후 양식 요리집을 경영할 생각으로 동경회관에 취직했다.

그러나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엄한 부름에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까지 스시를 만들어 보지 않는 손으로 스시를 만들기 위해 마음을 다시 고쳐 잡고 부친대신 부두에 가서 스시재료를 구입하는 등 에도마에스시의 일을 기초부터 공부해서 부기를 베우고 장부를 정리하는 등 자신과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가장 인기 있는 대표 격인 전어의 스시 솜씨가 스시 기술의 승부처다. 소금과 식초를 절인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7월 중순에 나오는 생후 4개월 된 전어처리 여하가 스시분야 숙련공 여부를 결정한다. 길이 5~6cm의 아주 작은 전어의 등을 따고 얼음을 넣고 소금을 처서 진열대에 잠시 숙성시킨다. 이를 유이씨가 자기 입술에 가까이 대보는 것은 과학적 수치보다 자기의 오랫동안의 감각을 믿기 때문이다. 수분과 지방분이 약간 떠오르면 물로 식초를 세척한다. 다시 식초에 몇 분 담갔다가 꺼내서 냉장고에 보관한다. 아주 작은 전어 한 마리를 상대로 몇 단계에 걸쳐 섬세하게 지켜져야 제대로 된 스시 맛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에도마에 스시가 출발한 것은 1818년부터다. 그 이전에는 스시집의 형태가 노상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파는 음식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주먹밥처럼 크게 만들었다. 점점 손에 쥔 형태로 변하고 보존식으로 절임이나 약간 익히는 등 오늘과 같은 스시가 되었다. 기스시의 제조 방법도 시대와 함께 변해왔다.

기스시집에 갈 때마다 고객들이 느끼는 즐거움은 카운터를 가운데 두고 바라보는 명인의 손놀림, 몸 동작 등이 마치 가부끼(歌舞技.일본의전통연극)를 보고 느끼는 희열과 같은 것이다. 몸짓과 행동 하나하나가 수련에 의해서 단련된 개성의 표현으로 느껴진다. 천천히 열심히 배우고 공부하면서 몸에 베인 기술은 후에 아무리 퍼 올려 써도 마르지 않는 우물과 같은 직업이 된다는 것이 오랫동안의 체험을 통해 얻은 스시명인의 직업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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