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지도자’가 사랑한 ‘애첩’들

글 정 하 일 / 주필

이른바 ‘기쁨조’의 무용수 고영희가 김정일의 눈에 띈 것은 대략 1970년대 중반이었다. 그녀는 이목구비가 반듯한 얼굴에 키도 크고 스타일이 좋은 미인이었으며 춤 솜씨도 뛰어나고 무대에서의 인상도 화려해 주변에서 높은 평판을 받고 있었다. 김정일은 이따금 연습실까지 찾아와서 그녀의 연습을 지켜보곤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75년경부터 고영희는 김정일의 비밀파티의 고정 파트너를 맡게 됐고, 1977년 들어 고영희는 연회에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된다. 김정일이 그녀에게 준 철봉리 별장에 살면서 김정일과 사실상의 동거생활에 들어간 것이다. 그 후 그녀는 79년 후반 창광산 관저에 들어가 그 곳의 ‘안주인’이 됐다.

고영희는 애첩(愛妾)에 불과했지만 김정일의 마음을 가장 오랫동안 사로잡았다. 그녀는 지난 2004년 6월경 프랑스 파리에서 암 치료 중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몇 년 전 군부대에 고영희의 초상화가 걸렸다는 증언이 잇따르고, 인민군대 강연 자료에 등장하는 ‘존경하는 어머님’은 고영희를 지칭한다는 해석이 등장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후계구도가 고영희의 아들 김정철로 모아지고 있다는 분석이 유력하게 제기됐다. 그러나 김정일은 후계 문제에 대해서는 그동안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김정일 첫 결혼 3년 만에 이혼

김정일이 정식으로 결혼한 첫 번째 부인은 김일성종합대학 러시아문학부를 졸업한 혁명 유자녀 홍일천이었다. 김정일이 정부호위총국 지도원으로 있을 당시인 1966년 가을, 홍일천과 결혼해 1968년 딸 김혜경을 낳았다.

그러나 성질이 괴팍했던 김정일은 그녀를 업신여겼으며 다른 여성들과 바람을 피우거나 손찌검까지 예사로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의 결혼은 결국 파경에 이르러 결혼 3년 만에 이혼한 것으로 전해진다.

홍일천은 그 후 1980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돼 정무원 보통교육부 부부장(문교부 차관)을 거쳐 지금은 김형직사범대학 학장이자 범민련 북측본부 중앙위원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일천 다음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을 낳은 성혜림이다. 성혜림은 남한 출신으로, 경남 창녕의 한 명문가의 3대 독자인 아버지 성유경과 1920년대 민족주의 잡지 <개벽>의 여기자였던 김원주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서울 풍문여중에 다니던 성혜림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어머니를 따라 북으로 갔다. 평양 예술학교를 졸업하고 1955년 평양연극영화대학에 입학, 1956년 19살에 당시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위원장이던 이기영의 장남 이평과 결혼해 딸을 낳았다. 이기영은 한국전쟁 때 월북한 유명한 시인이다.

성혜림은 평양연극영화대학에 재학 중이던 1959년 ‘경계선의 마을에서’라는 영화에 출연해 배우로 데뷔했다. 68년경 김정일이 조직지도 및 문화예술을 담당하고 있을 당시 만난 성혜림은 평양예술단 소속의 북한 최고 공훈배우였으며 김정일보다 다섯 살 많은 유부녀였다. 그녀는 이평과의 사랑 없는 결혼에 실망하고 있었고, 김정일은 중앙당을 통해 이평과 성혜림을 강제로 이혼시킨 후 그녀를 애첩으로 삼았다.

성혜림은 68년 ‘어느 자위단원의 운명’을 마지막으로 영화계를 떠나 69년부터 김정일과 정식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중성동 15호 관저에서 동거에 들어갔다. 당시 성혜림은 33살이었고, 김정일은 28살이었다. 성혜림과 동거사실은 김일성에게도 비밀에 부쳐졌다.

성혜림이 임신하자 김정일은 200평 정도의 ‘15호 관저’를 세워 그녀를 본처로 대우했다. 김정일이 성혜림과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것은 그녀에게 결혼경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1년 5월10일 성혜림은 고관 전용인 봉화진료소에서 아들 김정남(김정일의 장남)을 낳았다. 그러나 김정일은 성혜림과 동거하고 아들까지 낳은 사실을 아버지인 김일성에게 극비로 숨겼다.

김일성이 성혜림과 김정남의 존재를 안 것은 4년 뒤의 일이었다. 그동안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는 아버지 김일성의 진노와 그로 인한 불행한 사태를 염려하면서 성혜림에게 아이(정남)를 두고 오빠(김정일)로부터 떠나라고 끊임없이 권유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성혜림은 1970년대 후반부터 극도의 불안과 신경쇠약을 겪게 된다.

성혜림은 모스크바 크렘린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74년 봄 평양에 돌아온 성혜림은 다시 15호 관저에서 생활을 시작했으나 모스크바에도 아파트를 갖고 평양과 모스크바를 오가며 살았다. 이후 당뇨병 등을 앓던 그녀는 스위스와 러시아에 장기간 머물며 요양하다가 지난 2002년 모스크바에서 63세의 나이로 사망해 현지에 묻혔다.

김정일의 본처는 타자수 출신 김영숙

성혜림이 평양과 모스크바를 오가며 요양하고 있던 시기인 1975년 33살의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이 맺어준 김영숙과 정식으로 결혼을 한다. 김영숙은 함경북도 안전국 전화교환수로 일하다 중앙당에 와서 노동당 선전선동부에서 타이피스트로 일하던 이른바 혁명가 유자녀였다. 그녀는 김설송(雪松), 김춘송 두 딸을 낳았으며 아들 한명이 더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설송이라는 이름은 시아버지인 김일성이 직접 지어줬다고 한다.

그러나 김영숙은 김정일의 합법화된 여자라는 의미 이외에는 부인으로서 어떤 의미도 갖지 못했다. 김영숙에 대해서는 혁명가 집안에서 태어나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후 김일성 집무실에서 타자수로 일했다는 사실 이외에 구체적인 신상이나 얼굴은 공개되지 않았다.

통일부 발간 ‘2005 북한의 주요 인물’에는 김영숙을 퍼스트레이디 곧 영부인으로 지명하고 있다. 이미 사망한 성혜림이나 고영희가 훨씬 더 알려져 있지만, 동거 등으로 맺어진 이들과 달리 김정일과 정식으로 혼인한 김영숙을 영부인으로 봐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녀는 현재 두 딸과 함께 북한 호위사령부 초대소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에서는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낸 홍일천을 김정일의 첫 번째 여자라고 거론하고 있지만, 증언자의 직위와 북한 고위층에서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점이 증언의 신빙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김정일과 이혼 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직을 유지하는 것도 북한 체제의 특성상 납득하기 힘들다.

김정일은 이 세 여자 이외에도 젊은 시절부터 수많은 여인들과 관계를 가져온 것으로 알려졌다. 귀순자와 해외 보도를 근거로 추정해볼 때 김영숙, 성혜림, 고영희 이외에도 주 러시아 손성필의 여동생 손희림, 여배우 홍영희, 주 튀니지 대사의 처 이형연 등과 단기간 동거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김정일은 현재 마카오에 거주하고 있는 정일선 이라는 여인과의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기도 하다. 김정일은 이 밖에도 만수대 예술단 무용수, 교예조, 배우, 관저 담당 간호원, 김정일 집무실 타자수 등 수많은 여성들과도 단순한 접촉이 아닌 꾀 깊은 염문을 뿌렸던 것으로 알려진다.

김정일 사생활 폭로는 수용소행

김정일의 사생활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다. 김정일의 사생활을 알고 있는 경호부대인 ‘친위대’와 측근 및 관저 근무자(간부 5과)들은 공민증이 발급되지 않는다. 이들은 사회로 편입될 수도 없고 비밀을 누설했을 때는 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심한 경우 비밀리에 처형된다.
김정일은 남의 부인을 강제로 이혼시켜 데리고 살거나, 자신과 성혜림과의 관계가 폭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많은 예술인들을 수용소로 보내고, 여배우 우인희와의 관계에 대한 소문이 확대되지 않도록 당사자를 처형시키기까지 했다.

우인희는 6∙70년대 중반 북한 영화계에서 톱스타 위치에 있었다. 그녀는 영화감독 유호선을 만나 결혼해 3명의 자녀를 두게 된다. 70년대 후반 김정일과 불륜관계를 맺고 있던 우인희는 재일교포 청년과 또 다른 사랑을 하게 됐다. 그러던 중 두 사람이 차 안에서 히터를 켜고 잠들었다가 청년이 질식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세간에서 우인희에 대한 비난 여론이 쏟아졌다. 그녀는 조사를 받으면서 “지도자 동지를 만나게 해달라”고 큰소리를 쳤다. 최고 지도자를 찾는다는 소식이 김정일에게 들어가자, 김정일은 ‘인민배우 우인희는 부화 방탕죄를 범했으므로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한다’며 총살 지시를 내렸다.

김정일의 여자관계 폭로는 단순한 사생활 침해가 아니다. 북한사회에서 그것은 곧 국가기밀 누설로 취급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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