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평오 한국해양대학교 석좌교수·전 KOTRA 사장·전 주사우디아라비아 대사
권평오 한국해양대학교 석좌교수·전 KOTRA 사장·전 주사우디아라비아 대사

글로벌 비즈니스에서 아세안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 예전에도 잠재 거대시장으로서 아세안의 중요성이 작지 않았지만, 최근의 미-중 무역분쟁과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아세안의 가치가 훨씬 커진 것이다. 이에 따라 많은 강대국들이 앞 다퉈 아세안국가들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기업들은 이 지역을 주 무대로 하는 비즈니스전략을 추진하는데 여념이 없다. 이제 우리도 아세안의 달라진 가치에 맞는 협력관계를 모색할 때이다.

알다시피 아세안은 1967년 결성된 10개 동남아시아 국가들 간의 연합체다. 유럽연합(EU)보다는 느슨한 통합체로서 경제적 차원의 관세동맹(Customs union)에 정치·안보·사회문화 차원의 협력이 결합된 공동체이다. 아세안의 특성은 한 마디로 ‘다양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아세안이 위치한 동남아시아는 먼 옛날부터 주요 문명 간 해상무역의 교차로였다. 그래서 아세안은 자연스럽게 그 지역의 토착문화와 중국·인도·중동·유럽 문화가 혼합되어 있다. 경제적으로는 인구는 6.6억 명으로 타 신흥시장인 중동(5.3억), 중남미(6.4억)에 비해 많지만 국내총생산(GDP)은 3.1조$로서 상대적으로 작다. 평균 1인당 GDP는 4,700$ 수준인데, 최빈국인 미얀마(1,300$)와 최부국인 싱가폴(65,230$) 간에 50배의 차이가 있어 회원국별 소득수준도 천차만별이고, 종교도 불교 이슬람 카톨릭 힌두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이러한 다양성이 과거엔 아세안의 발전에 장애요인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오늘날에는 강점으로 작용한다. 다양한 문화와 종교, 여기에 나라별 발전정도의 차이가 아세안을 글로벌 테스트베드로 변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정치적 측면에서 아세안에서의 강대국간 경쟁상황은 차치하더라도, 경제적 측면에서 최근 아세안 국가들에서의 교역 및 투자 동향을 보면 이곳이 미-중  간의 또 다른 전장(戰場)이 돼가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든다. 먼저 교역 면에서 2020년 기준 아세안의 최대 파트너는 중국으로 2위인 미국에 비해 2000억$ 많다. 그런데 수출만 보면 아세안의 대미 수출(2,112억$)이 대중 수출(2,174억$)에 매우 근접할 정도로 증가하고 있고, 이 결과 미국에 대해 1000억$가 넘는 흑자를 보이고 있다. 이는 아세안 측에서 보면 미국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020년 아세안이 EU를 제치고 중국의 최대 교역파트너가 되었지만 대중 교역에서 아세안은 810억$의 적자를 보여 중국이 양측 간 교역의 혜택을 더 크게 보는 셈이다.

한편 투자 측면에서 지난 수년간 중국 기업들의 투자가 크게 늘어나다가 최근 들어 주춤한 가운데, 미국 기업들의 투자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나이키 아디다스 애플 구글 등 글로벌기업의 많은 협력사들이 미-중 무역분쟁 이후 생산기지를 중국에서 아세안으로 이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코로나19 상황 하에서 미-중 양국은 아세안과의 백신외교도 강화하고 있다. 올해 8월까지 미국은 아세안에 2,300만 도스 이상의 백신과 1억 5,800만$ 이상의 코로나19 관련 원조를 하였고, 중국도 아세안에 1억 9000만 도스 이상의 백신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우리가 아세안의 가치를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최근의 글로벌 가치사슬(GVC) 재편 과정에서 아세안이 갖는 중요성이다. 아세안은 풍부하고 젊은 경제활동 인구와 저렴한 인건비 등으로 생산 효율성과 시장 성장성이 커서 Post-China로서의 훌륭한 요건을 갖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른 신흥경제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은 기업환경과 폭넓은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노력도 제3국 기업들의 투자진출에 매력적인 조건이 되고 있다. 여기에 니켈(인도네시아)과 메콩강 수자원 등 풍부한 자원까지 갖추고 있어 이 지역 국가들이 차세대산업 분야에서 새 가치사슬의 허브로 도약하려는 야망을 갖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다.  

이러한 아세안의 가치 상승과 역학관계의 변화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새로운 협력전략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입장에서 아세안은 2위 교역 파트너이자, 2위 직접투자 대상지역이다. 한국인의 해외 방문지 1위이자 국내 외국인 관광객 2위 지역이기도 하다. 이것은 우리 입장에서 봤을 때의 관계다. 아세안 입장에서 보면 한국은 5위 교역 파트너, 6위 직접투자 국가로 다소 위상이 처진다. 게다가 상위 5개 교역 파트너 중 미국․EU는 물론 일본에 대해서도 아세안이 흑자를 보이지만 중국(2020년 810억$)과 한국(377억$)에 대해서는 적자를 보이고 있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역역조 시정을 요구한다.

현 정부에서는 ‘사람 중심의 평화와 번영’을 모토로 하는 신남방전략을 통하여 아세안을 4강 수준의 협력파트너로 격상하고 정상 방문과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개최 등 각별한 노력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아쉽게도 코로나19로 많은 협력 사업이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신남방정책 추진 4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최소한 경제적 측면에서라도 최근의 상황변화를 감안한 새로운 협력관계를 재설계해야 한다. 국제경제학에 국가 간의 교역관계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중력모델(The Gravity Model)이 있다. ‘두 국가 간의 무역은 양국의 경제규모에 비례하고 거리에 반비례한다’는 것인데 타당성이 상당히 높다고 한다. 이 모델대로라면 경제규모가 커지고 거리가 비교적 가까운 아세안과 우리나라 간에는 교역·투자 등 협력관계를 키울 수 있는 잠재력이 매우 크다. 게다가 아세안은 앞서 말한 대로 여러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서 다른 지역협력체에 비해 배타성도 상대적으로 약하다. 회원국 간 역내 교역비중이 22%에 불과한 점이 그것을 반증하고 있다. 여러 측면에서 우리의 훌륭한 협력 파트너임에 틀림없다. 정부와 기업 차원에서 최근 가치가 높아지고 있는 아세안을 바라보는 시각과 전략에 변화가 있어야 함을 인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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