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강호동양학자·작가
조용헌 강호동양학자·작가

스승,돈,암자,친구. 이 4가지를 한문으로 법재지려(法財地侶)라고 한다. 도사가 되려면 이 4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어느 하나가 빠지면 도사되기 힘들다. 모든 일에는 ‘아구’가 맞아야 하는 것이다. 이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법은 스승이다. 스승이 없이 자기 혼자 도 닦다가가는 나이롱으로 빠진다. 샛길로 빠지는 것이다. 스승은 캄캄한 밤길을 갈 때 길을 비춰주는 등불의 역할을 한다. 캄캄한 밤길 정도가 아니라 그 보다 훨씬 더 난이도가 높은 심연을 지나가야 할 때도 있다. 깊은 어둠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심연(深淵). 이 깊은 물길을 건널 때 좁은 외나무 다리가 놓여 있고 도사 훈련생은 이 외나무 다리를 건너야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때 한발 헛디디면 그대로 시커먼 물 속으로 추락이다. 심연에 놓인 외나무 다리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수가 생긴다. 이때 중심을 잡아주고 살 길을 알려주는 존재가 바로 스승이다. 법(法)이라고 부른다. ‘법’이라는 단어는 참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진리를 가리키기도 하고, 어느 차원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규칙과 법칙, 내지는 원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스승을 만나는 것도 기연(奇緣)이다. 오다 가다 길에서 만나는 수도 있고,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을 때 만나는 수도 있다. 

중국 당나라 말기와 오대에 걸쳐 활동한 도사가 여동빈이다. 이 여동빈은 과거 시험에 낙방하였다. 과거는 중국과 한국에서는 인생의 전부였다. 일본은 칼 부림을 잘하는 사무라이가 되는 것이 출세의 길이었지만, 중국,한국은 종이 시험지에 답안을 잘 써서 합격을 해야만 출세를 할수 있었다. 과거 낙방은 그동안 쌓은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경험이다. 인생의 깊은 슬픔과 회의를 맛보게 한다. 여동빈은 깊은 낙담을 안고 강호를 돌아다녔다. 오라는데도 없지만 정처 없이 여기 저기 유랑생활을 하다가 여산(廬山)을 지나다가 만나게 된 스승이 바로 종리권이었다. 종리권 사부로부터 도를 전수받았고, 아울러 천둔검법(天遁劍法)을 마스터 하였다고 전해진다. 천둔검법이란 ‘하늘로부터 자기를 숨기는 검법’이다. 남들이 자기를 잘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이 검법으로 수많은 요괴들과 귀신들을 쳐 없앴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래서 여동빈은 검선(劍仙)으로 추앙받았다. 조선조에 능호관 이인상이 그린 그림 가운데 칼을 들고 수염을 기른 모습의 도인 그림이 있는데, 이게 바로 검선으로 추앙받았던 여동빈을 모델로 한 그림이다. 도교의 신선은 칼을 든 검선으로도 그려졌던 것이다. 나도 2000년 무렵에 중국 올라갔던 적이 있다. 여동빈 수행처를 답사하기 위해서였다. 

여산은 중국에서도 특별한 산이다. 도사들이 가장 많이 숨어 살면서 수도를 했던 산이 여산이다. 왜 여산이 그런가? 주변에 호수와 강이 많다. 산 주변에 호수와 강이 많으니까 안개가 많이 낀다. 여산 주변에는 항상 안개가 끼어 있어서 여산의 전체 모습을 보기 쉽지 않다. 밖에서 보면 안개에 휩싸여 있는 산이므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신비감을 주는 산이었다. 그래서 생긴 표현이 ‘여산진면목(廬山眞面目)’이라는 구절이다. 여산의 진면목은 알기 힘들다는 뜻이다. 공부가 깊거나 인품이 그윽한 인물의 속은 알기 어렵다는 의미로도 통한다. 수양이 얕으면 바로 살림살이 본전이 노출되지만 도력이 깊은 도인은 좀처럼 그 심법(心法)의 깊이를 추측하기 어려운 법이다. 여산은 신비에 쌓인 산으로 대접 받아왔다. 실제로 산을 올라가 보니까 지리산과 설악산을 합쳐 놓은 듯한 분위기였다. 지리산은 육산이라 후덕한 맛이 있고, 설악산은 바위가 노출된 골산이라 날카롭고 단단한 맛이 있다. 여산은 이 두가지 요소를 모두 겸비한 산이었다. 한쪽면은 육산이었는데 다른 쪽으로 가니까 바위가 차곡 차곡 쌓아 올려져 있는 듯한 골산의 모습이 보였다. 산수화에서 그림을 그리는 기법 가운데 하나인 부벽준(斧劈皴)의 기법을 교과서적으로 보여주는 풍광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끼로 바위를 찍은 듯한 묘사법이 부벽준이다. 그 부벽준의 풍광 중간 바위 틈새에 동굴이 하나 있었고, 그 동굴 입구에 ‘仙人洞’이라고 써 있었다. 여동빈이 여산에서 도를 닦을 때 머물렀던 동굴이었다. 동굴 밖으로는 그야말로 산수화의 부벽준이 잘 표현되어진 풍광이 연출되고 있었다. ‘아! 신선은 이런데서 살았구나!’라는 감을 얻었다. 아무데서나 사는게 아니구나! 더군다나 선인동 주변은 온통 바위 덩어리들로 둘러쌓여 있었다. 

그 바위산에서 품어져 나오는 암기(岩氣)가 장난이 아니었다. 만볼트 급의 기운들이 주변을 감아 돌고 있었다. 그러니 그 굴속에 있으면 자동적으로 압력 밥솥에 들어간 것처럼 곡식이 푹 쪄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또 한가지 흥미를 끌어던 부분은 동굴 속에 있는 샘물이었다. 동굴 내부에는 샘물이 솟아 나오고 있었다. 사람이 산에서 살면 물이 반드시 필요하다. 매일 물 길러 가는 것도 고역이다. 아주 가까운 지점에 샘물이 있어야 한다. 더군다나 동굴 안에 있으니 이 얼마나 편리한가! 물 맛도 좋았다. 암반 가운데서 샘 솟는 물은 미네랄도 풍부하기 마련이다. 미네랄을 섭취해야 건강을 유지한다. 좋은 물만 먹어도 장수한다는 이야기는 이 물속에 함유된 미네랄 탓이기도 하다. 선인동은 여러 가지 조건이 갖추어진 도사의 수행터였다. 나는 지금도 이상적인 수행터의 조건을 떠 올릴때마다 여산의 바위 절벽 중간에서 보았던 이 선인동을 떠 올린다. 아마도 이 터는 여동빈이 스승이었던 종리권 진인으로부터 물려 받은 장소가 아니었을까. 아니면 스승이 ‘여기에 내가 봐 두었던 터가 있다. 너는 여기서 공부 하거라’해서 머무르게 된 수행터가 아니었나 싶다. 하여간 여동빈은 여산에서 스승을 만나 여기에서 공부를 하여 어느 차원에 진입하게 된 것이라고 보여진다. 구한말에 김제 모악산에서 수도를 하였던 강증산도 여동빈 신선 이야기를 자주 하였다. 여동빈은 조선에까지 그 전설이 회자되었던 인물이다. 신선계를 대표하는 도인이었다. 그가 스승을 만나게 된 계기는 과거시험 낙방이었고, 이 낙방이야말로 큰 스승을 만나게 해 준 기연으로 작용하였다. 과거 합격하였더라면 그저 그런 관리로 살다가 인생을 마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낙방이 인생을 바꿨다. 그러니 낙방도 길게 보면 꼭 나쁜 것도 아니다. 사람은 실패를 해 보아야 다른 세상과 만날 수 있다. 실패 없는 사람은 그 나물에 그 밥만 먹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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