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덕 칼럼니스트
장경덕 칼럼니스트

‘나는 미래를 보았다. 잘 작동하고 있었다.’

볼셰비키 혁명 후 소비에트 러시아를 다녀온 미국 언론인 링컨 스테펀스는 그렇게 말했다. 혁명 정권은 가난과 부, 수뢰, 특권, 폭정, 전쟁 같은 거악들을 뿌리 뽑겠다고 했다. 소수의 훈련된 집단이 뒷받침하는 독재체제로 몇 세대에 걸쳐 경제적인 힘들을 과학적으로 재편하면 먼저 경제 민주화를 이룰 수 있고 나중에는 정치 민주화도 가능할 것이었다. 실제로 제1차 5개년 경제계획이 시작된 1928년부터 반세기 동안 소련 경제는 무섭게 성장했다. 계획과 명령을 통해 비효율적인 농업 부문의 자원을 공업으로 재분배하면서 급속한 산업화가 가능했다.

1970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폴 새뮤얼슨은 거듭 소련의 경제적 우위를 점쳤다. 1948년에 출간한 그의 경제학 원론 교과서는 2019년까지 20판이 나왔다. 40여 개 나라에서 400만 부 넘게 팔린 것으로 추산된다. 이 책 1961년 판에서 새뮤얼슨은 소련의 국민소득이 1984년에 미국을 앞지를 가능성이 있고 1997년에는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소련 경제는 기세는 완전히 꺾여버렸다. 그러나 새뮤얼슨은 1980년 판에도 그 분석을 바꾸지 않았고 다만 미국을 추월하는 시기를 2002년(가능성이 있다)과 2012년(가능성이 크다)으로 늦췄을 뿐이다.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 원리를 꿰고 있던 이 걸출한 경제학자는 소련 제국이 무너지기 10년 전에도 그 체제의 혁신 능력을 믿었던 것일까.

적어도 초기에는 그럴 만도 했다. 특히 군사와 우주·항공 분야에서 소련의 과학기술 혁신은 눈부셨다. 1957년 10월 4일 소련은 ‘동반자(스푸트니크)’라는 이름의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다. 성능 좋은 망원경으로는 육안으로도 볼 수 있는 이 공 모양의 위성에 미국인은 경악했다. 공은 시속 1만8000마일로 날아갔다. 미국 언론은 ‘러시아의 달이 지구를 돌고 있다’고 썼다. 4년 후 소련은 유리 가가린을 태운 유인우주선을 발사했다. 위성과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로켓이나 핵탄두를 실어나를 탄도미사일이나 기술은 다 같은 것이었다.

소련은 일찍이 무기 개발과 제조업 발전에 반도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1950년대부터 곳곳에 연구 시설을 만들고 가장 뛰어난 과학자들을 불러모았다. 유리 가가린이 처음으로 우주를 비행한 이듬해인 1962년 젊은 공학자 유리 오소킨이 처음으로 집적회로를 만들었다. 그 이듬해에는 러시아의 실리콘 밸리로 키울 젤레노그라드도 제 이름을 얻었다. 소련은 확실히 과학기술 분야의 수퍼파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곧 한계가 드러났다. 리가의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오소킨은 1980년대 말 몇몇 직원들의 해고를 요구하는 KGB와 불화를 겪다 자리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소련의 반도체 수요는 서방 국가들과 달리 소비재 산업보다 군수 산업에 지나치게 몰려 있었다. 그만큼 시장은 제한적이었다. 광범위한 글로벌 공급망에 접근할 수도 없었다. 그나마 분업이 가능한 나라는 동독밖에 없었다. 미국과 유럽, 일본, 한국, 대만이 참여하는 광범위한 협력 네트워크를 통해 투자 위험을 분산할 수 있었던 서방과 경쟁할 수 없는 구조였다.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러시아 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1% 미만이었다.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러시아의 군수 산업은 첨단 반도체에 목말라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 초기에 정밀 유도 미사일을 집중적으로 퍼붓지 못했던 것도 러시아의 허약한 반도체 산업 기반 탓으로 볼 수 있다.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를 비롯한 한 무리의 혁신가들이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설립하고 사흘이 지났을 때 스푸트니크가 미국의 하늘을 가로질렀다. 미국과 소련의 우주와 군비 경쟁이 격화하면서 컴퓨터와 트랜지스터에 대한 가장 확실한 시장과 수요가 생겼다. 로켓과 미사일 앞쪽의 뾰족한 노즈콘에 들어갈 정도로 작은 컴퓨터가 필요했다. 엄청나게 많은 트랜지스터를 소형 부품에 집어넣을 방안을 찾아야 했다.

스푸트니크의 충격은 역설적으로 실리콘 밸리의 반도체 산업에 든든한 발판을 만들어주었다. 지구촌에서 처음으로 인공위성과 유인우주선을 쏘아 올렸던 나라는 냉전에서 패했다. 그리고 이제 또 다른 전쟁에서 핵심 기술 부족으로 고전하고 있다. 소련의 기세를 믿었던 새뮤얼슨은 무엇을 보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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