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일생에 단 한 번 우는 새는 가시나무새다. 그 새는 날카로운 가시를 향하여 돌진하여, 자신의 몸이 가시에 찔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소리를 내지른다. 그래서 가시나무새는 한평생 그런 가시를 달고 있는 나무를 찾아다닌다. 신화속 이야기이지만 묘한 매력과 마력을 머금고 있어 여러 소설·영화·드라마·노래 등의 모티브가 되어 환생했다. 1977년 오스트리아 여류 소설가 콜린 매컬로(Colleen McCullough, 1937~2015)가 쓴 소설, 『가시나무새』가 그 산물이다. 매컬로는 그 울음소리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소리보다 아름답다고 했다. 죽어가는 순간, 그 새는 고통을 초월하면서 이윽고 종달새나 나이팅게일도 낼 수 없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 1987년 박춘석은 이 소설을 모티브로 <가시나무새> 노래를 지어서 패티김의 목청에 걸었다. 당시 박춘석은 58세, 패티김은 50세였다. 두 사람은 1958년 미8군무대에서 처음 인연을 맺어, 이루지 못한 사랑을 품고 살다가 영원히 이별한, 영혼의 피앙새였다. 그대 곁에 가고파도 날 수 없는 새가 되어~.

황혼이 밤을 불러 달이 떠도 / 고독에 떨고 있는 가시나무새 / 어둠이 안개처럼 흐르는 밤에 / 환상의 나래 펴네 / 그대 곁에 가고파도 / 날을 수 없는 이 몸을 / 그대는 모르리라 / 가시나무새 전설을 / 가시나무새 가시나무새 / 날을 수 없네 / 날을 수 없네 / 서글픈 가시나무새 // 찬바람 이슬 내린 가지 위에 / 외롭게 떨고 있는 가시나무새 / 한숨이 서리 되어 눈물 흘러도 / 님 찾아 날을 수 없네 / 그대 곁에 가고파도 / 날을 수 없는 이 몸을 / 그대는 모르리라 / 가시나무새 전설을 / 가시나무새 가시나무새 / 날을 수 없네 날을 수 없네 / 서글픈 가시나무새.

비련 주인공들의 얼굴이 실루엣처럼 노랫말에 어른거린다. 노래 속, 그대 곁에 가고파도 날을 수 없는 새는, 이 노래를 작사 작곡한 박춘석이다. 당시, 박춘석은 애초부터 패티김을 바라보며 홀로 살아온 총각이었고, 패티김은 첫 남편 길옥윤과 이혼하고, 이태리계 남편 아바라도 게디니와 재혼한 후 활동을 계속하고 있던 유부녀 가수였다. 그래서 이와 비슷한 삶의 터널을 살아가고 있던 비련의 주인공들은 스스로 <가시나무새> 노래의 감흥 주인공이 되어서, ‘그대는 모르리라, 가시나무새 전설을~’ 곡조에 핏대 돋는 목청을 벌렁거렸던 것이다.

가시나무새가 이승을 등지면서 내지르는 소리, 그 소리를 들으면 온 세상은 침묵 속에서 귀를 기울이고, 신(神)도 미소를 짓는단다. 왜 사람들은 스스로 가시나무새가 되어, 잊을 수 없는, 나의 마음(몸)을 찔려죽게라도 할 듯한, 가장 날카로운 가시를 찾아 헤매는가? 어둠이 안개처럼 혼무한 밤바다에 가시를 찾아서 외로운 돛단배를 타고, 바람결에 영혼의 날개를 다는가. 이 새는 1983년 영화 『가시나무새』(The Thorn bird)로 노래 <가시나무새>보다 먼저 이 세상에 나왔었다. 미국의 듀크(Daryl Duke)가 감독·출연한 영화다. 신부(神父)와 소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그린, 콜린 매컬로의 베스트셀러 원작을 5부작 미니시리즈로 제작한 작품이다. 줄거리는, 1910년대 호주 드로레닥 목장에 부임하게 된 신부, 랄프는 가족의 무관심 속에 외롭게 살아가던 소녀, 매기를 딸처럼 돌봐주게 된다. 랄프 신부의 보살핌 속에 사춘기를 보내고, 처녀가 된 매기는 랄프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사랑을 고백하여, 랄프 신부를 당황하게 한다. 랄프 또한 성직에의 충정과 매기의 사랑 사이에서 갈등을 겪지만, 결국 성직의 길을 걷는다.

1958년 봄날, 서울 중앙여고를 졸업한 21세 김혜자는 명동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너 혜자 아니냐?’ 혜자의 작은 오빠 친구 곽준용이었다. 준용은 가끔 기타를 둘러메고 김혜자의 집으로 와서 혜자의 형제들과 어울려 노래를 부르곤 했었다. ‘어머 준용 오빠, 저 직장 구하러 다니는 중이예요.’ 준용은 혜자의 대답에 놀란 듯 잠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더니, ‘너 노래 한번 해보지 않을래? 노래 잘하잖아.’ 한국대중가요사에 전설의 디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며칠 뒤, 곽준용은 김혜자를 화양흥업 전무 베니김 집으로 데려갔다. 당시 곽준용은 화양흥업 소속 기타리스트였다. 화양흥업은 국내 최초의 기획사로 미8군무대에 출연자를 공급하고 있었으며, 베니김은 기획자였다. 서울대 치대 출신 베니김은 피아노와 트럼펫연주자로서 직접 가수를 선발했다. 베니김의 아내 이해연은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부른 가수, 미8군무대에서도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 부부 사이에 태어난 3남매가 김파·김단·김선, 1970년대 인천 연안부두를 모티브로 만든 노래 <연안부두>를 절창한 김트리오이다.

1956년 흑백 TV 방송이 시작(12월 1일)되기 전, 국내에서 연예인이 설 자리는 미8군무대가 유일하다시피했다. 미8군은 제2차세계대전 말기이던 1944년 일본 오끼나와에서 창설되어, 동남아시아 섬과 필리핀 일대에 주둔하던 일본군을 항복시키고, 1955년 동경에서 우리나라 서울로 사령부를 이전해 온 부대이다. 이들을 상대로 펼친 우리나라 대중연예인(가수·희극인·안무·연주가 등)들의 음악시장이 미8군무대이다. 미8군은 6.25 전쟁 중 우리나라를 지원한 미군의 주력이며, 1965년 베트남 전쟁터로 이전해 갈 때까지를 미8군무대 1기, 그 이후를 미8군무대 2기로 치면 된다. 패티김·신중현·현미·한명숙 등은 1기이고, 조용필 등을 2기로 치면 되리라. 초창기 우리나라 주둔 민군은 30만여 명, 오늘날은 2~3만여 명이다. 그래서 오늘날은 미8군무대라는 말이 통설되지 않는 것이다.

‘김혜자라고 했지? 그래 무슨 노래를 부를 줄 아니?’ 약속을 한 듯 두 사람이 들어서자, 베니김은 피아노 앞에 앉아 뚜껑을 열었다. 표정은 엄숙하고 진지했으나, 말투는 부드러웠다. 김혜자는 <You don`t know me>와 <Memories are made of this> 두 곡을 잇달아 불렀다. ‘굉장히 소질이 있군, 가수가 되고 싶니?, 예!’ 김혜자는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내일부터 우리 집에 와서 레슨을 받아라.’ 베니김은 철저하게 미8군무대를 겨냥하여 노래와 안무를 지도했다. 눈코 뜰 새 없는 사이 한 달이 지났다. 연습을 마치고 귀가하려는 김혜자에게 베니김이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네 월급이야. 한 달이 지났잖아.’ 레슨비를 걱정하고 있던 김혜자에게 오히려 월급을 주었다. 집에 와서 펼쳐보니 3만 환이 들어 있었다. 당시 서울의 대학교 1년 등록금이 6만 환쯤 하던 시절이었다. 명인명견(名人明見)이다. 난 사람은 난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다. 낭중지추(囊中之錐)이기도 하다.

연습생으로 3개월이 지나자 베니김은 김혜자를 무대에 세웠다. 아내 이해연과 듀엣으로 패티 페이지의 팝송 두 곡을 부르게 한 것이다. 그만큼 김혜자는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고, 베니김의 조련에 빨리 적응했다. 김혜자는 이해연과 똑같이 까만색 미니스커트에 역시 소매 없는 까만색 타이티 재킷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객석에서 난리가 났다. 20대의 혈기 발랄한 미군들, 자유분방한 청년들이었다. 그들의 눈에 168㎝ 키에 콜라병 몸매인 21세의 김혜자, 그녀의 인기는 무대에 서는 첫 순간 이미 하늘을 찔렀다. 이때 김혜자는 처음으로 린다김이라는 예명으로 소개되었다. 3개월 뒤인 1959년 초, 린다김은 단독으로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당시 미8군은 3개월마다 오디션을 거쳐 쇼단을 재선정했다. 심사는 엄격하여 A·B·C 등급을 받아야 합격이고, D등급을 받으면 탈락이었다. 등급에 따라 개런티(출연료)에 차이가 났다. 오디션에 합격하여 재계약을 맺으면, 그때부터는 레퍼토리는 물론 안무와 의상까지 새로운 것으로 바꿔야 했다. 그 오디션에서 린다김은 <Till>(사랑의 맹세)과 <Padre>를 불러 특A를 받았다. 이 두 곡은 당시 박춘석이 베니김과 의논하여 패티김에게 건넨 노래였다. 그날 박춘석은 가슴 속에 김혜자를 향한 방 하나를 차렸다. 끝끝내 이루지 못한 비련의 사랑방. 오디션을 마치고 청파동 베니김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선생님, 저 이름 패티김으로 바꿀래요.’ 린다김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린다김은 베니김이 지어주었기 때문에 예명을 바꾸는 것은 자칫 스승을 거역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터였다. 패티란 예명은 김혜자가 가장 좋아하는 미국 여성가수 패티 페이지(1927~2013)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패티김, 그 참 좋은 이름이구나. 오늘부터 패티김으로 부르자.’ 그날 이후 패티김은 2012년 74세, 가수 생활 54년을 결산하는 <이별>을 전국 16개 지역에 순회공연 한 후, 2013년 가수 생활을 마감했다. 패티김은 길옥윤(1927~1995)과의 사이에 정아, 이태리 남편(아바라도 게디니, 1976년 재혼)과의 사이에 카밀라 게디니가 있다.

이 패티김을 사랑한 예술가, 박춘석은 패티김의 첫 남편 길옥윤과 연정의 라이벌이었으며,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2010년 총각귀신으로 하늘 여행을 떠났다. 패티김은 박춘석이 지은 노래를 많이 불렀다. 박춘석은 경기고 1학년 때 명동의 황금클럽에서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다. 1949년 서울대에 피아노 전공으로 입학하였으나, 1년 만에 중퇴하고 신흥대학(경희대. 이회영, 신흥무관학교 후신)영문과에 편입해 졸업하였다. 1930년 서울 출생인 그는 해방 광복 이후 우리 음악 1세대다. 패티김은 첫사랑이자 대중예술의 동반자이면서 영혼의 부부 같았던 박춘석의 영결식장에서 <초우>를 부르며 영별했다. 너무나 사랑했기에 잊을 길 없는 연인을, 흩날리는 빗줄기 사이로 장송(葬送)했다. 패티김은 박춘석이 한평생 찾아 헤맨 가시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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