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덕 칼럼니스트
장경덕 칼럼니스트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업체 ASML의 기업가치는 2400억 달러를 웃돈다. 22일 주식시가총액으로 가늠한 것이다. 투자자들은 이 회사 몸값으로 한 해 이익의 41배를 쳐준다. 미국을 대표하는 반도체업체 인텔의 몸값은 그 절반인 1200억 달러 남짓하다. 한 해 이익의 9배 정도다. TSMC나 삼성전자, 인텔 같은 반도체의 거인들은 모두 ASML 앞에 줄을 선다. 이 회사의 장비 없이는 최첨단 반도체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빛으로 반도체 회로를 새기는 노광장비를 만든다. 빛에 반응하는 감광액을 기판에 바르고 회로 패턴을 그린 마스크를 씌운 다음 빛을 쬐는 방식은 이미 오래전에 나온 기술이다. 그러나 광원으로 극자외선(EUV)을 활용하는 장비는 ASML만이 만들 수 있다. 나노 미터(nm, 10억 분의 1m)를 따지는 초미세 회로를 새겨 넣으려면 파장이 극히 짧은 빛을 쏘아야 하는데 이 회사는 파장이 13.5nm에 불과한 EUV 광원을 쏠 수 있는 장비를 상용화했다. 그 전에 쓰던 광원의 파장은 248nm나 193nm였다.

이 장비를 개발하는 것은 엄청난 도박이었다. 빛을 만들고 쏘는 기술 하나하나가 오랜 축적의 시간이 필요한 데다 그 기술을 절묘하게 조합하고 수많은 부품을 조달하는 것도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 빛을 만들어내려면 진공 상태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극히 미세한 주석 알갱이를 레이저로 두 번씩 쏴 맞춰서 플라스마 상태로 만드는 일을 초당 5만 번이나 해야 한다. 그러자면 새로운 초강력 레이저가 있어야 한다. 빛을 모아서 실리콘 칩으로 정확히 보낼 거울을 만들려면 최고의 광학기술도 확보해야 한다. 이 일을 맡은 독일 업체는 달에 있는 골프공을 맞힐 정도의 정밀도를 자랑한다.

적어도 당장은 대체 불가능한 이 장비업체는 어떻게 태어나고 자랄 수 있었을까? 시간을 30년 전으로 되돌려 보자.

1992년 세계 최대 반도체 생산업체인 인텔은 파장이 13.5nm인 EUV 개발에 투자하기로 한다. 장비를 직접 만들 생각은 없었으므로 믿을 만한 협력 상대를 찾아야 했다. 당시 이 시장의 강자는 캐논과 니콘이었다. 그러나 일본 업체들과 격돌했던 미국 반도체 제조사들로서는 핵심 장비를 캐논과 니콘에 의존하고 싶지 않았다. (니콘은 이 기술을 믿지 않았다.) 미국 장비업체들은 기술 경쟁력에서 밀렸다. 남은 대안은 1984년 필립스에서 분리된 ASML밖에 없었다.

네덜란드는 미국과 일본의 반도체 전쟁에서 중립적인 위치에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미국 정부로서는 미래 반도체 산업의 성패를 가를 수도 있는 기술을 외국 기업에 내어주는 것은 꺼릴 만도 했다. 안보상의 이유로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인텔은 걱정하지 않았다. 일본 반도체업체들을 물리치고 독보적인 위상을 굳힌 인텔이었다. ASML이 빨리 첨단 장비를 공급해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냉전에서 승리한 미국에서 기술 수출에 대한 경계심이 전에 없이 풀어진 상태였다. 일본 반도체업체들의 도전은 정치적으로 물리쳤다. 러시아의 기술력은 더 이상 큰 위협이 아니었다. 중국은 까마득히 뒤떨어져 있었다. 어떤 산업이든 가능한 한 글로벌 공급망을 확대해 가장 효율적으로 생산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게 해서 교역이 늘어날수록 지정학적인 긴장도 더 누그러질 것이었다.

ASML은 더없이 좋은 기회를 잡았고 결국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던 EUV 기술 상용화에 성공했다. ASML은 인텔의 투자를 받고 미국 싱크 탱크의 기술을 얻고 미국 관련 업체를 인수할 수 있었다. 그런 협력 틀에서 배제된 일본 장비업체들은 경쟁을 포기했다. ASML은 또 필립스가 TSMC에 투자한 덕분에 처음부터 큰 수요처를 확보할 수 있었다.

ASML의 EUV 장비에 들어가는 부품 중 이 회사가 직접 만드는 것은 15%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머지는 글로벌 공급망의 수천 개 업체로부터 조달한다. 광원을 만드는 자회사는 미국에 있다. 첨단 장비의 중국 수출을 막으려는 미국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구조다. 그러나 이 회사는 확실히 ‘슈퍼을’이다. 반도체 업계의 거인들이 모두 차세대 노광장비 확보에 사활을 걸기 때문이다.

새로운 EUV 장비를 입도선매하면서 장비 선점 경쟁에 열을 올리는 팻 겔싱어 인텔 CEO는 시간을 30년 전으로 돌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때 인텔이 더 공격적으로 베팅해서 이 기술과 장비를 독점할 수는 없었을까? 반도체의 패권을 놓칠 수 없는 미국 정부도 후회하고 있을지 모른다. 지금 같은 미국이라면 과연 ASML의 부상을 선뜻 용인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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