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6·25전쟁 62주년은 과거 어느 해보다 심란합니다. 6·25는 휴전 됐을 뿐 강화(講和)된 것이 아니고, 기술적으로 전쟁상태임을 새삼 알게 합니다. 19대 국회에 이른바 종북 세력이 진출하면서 철 지난 이념논쟁이 봇물을 이룹니다. 좌익세력의 준동과 우익진영의 무차별적인 진압으로 유혈이 낭자했던 해방정국은 아니지만, 여야 사이에 오고가는 언어의 폭력성으로 치면 그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습니다.

“6·25가 남침인지 아닌지 말하지 않겠다”로 시작된 종북세력의 이념의 말장난은 “종북이 뭐가 문제냐? 종미가 문제지”로 번지더니, “탈북자는 북한에 대한 변절자 xx”가 되었고, 마침내 “이 나라에 국가는 없다”는 얘기에까지 미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체제의 근간으로 여기는 것들인데, 종북세력은 지하 서클활동하면서 쑥덕대던 얘기를 당당히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체제를 농락하듯이 마구 내뱉습니다. 그들에게까지 세금으로 월급을 대야하는 절대 다수 국민들이 반감을 표시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6·25 전쟁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었습니다. 남북 모두가 패자인 민족의 재난이었습니다. 6·25의 진정한 승패는 전쟁 후에 나왔습니다. 지난 60여 년 동안 남북은 치열한 체제경쟁을 벌였고, 그것이 결과한 남북한의 경제력의 격차, 민주화의 격차가 이 전쟁의 진정한 승패를 갈랐습니다.

6·25 이후 1970년대까지만도 남북은 서로를 부정하는 경쟁을 폈습니다. 선의의 경쟁이란 서로의 좋은 점을 닮으려는 경쟁인데, 남북은 상대의 나쁜 점을 닮으려는 악순환의 경쟁이었습니다.

민주역량도 모자랐고 특히 경제력에서 북쪽에 뒤졌던 해방 후 20여 년 동안 남쪽도 그랬었습니다. 1950년대까지만도 국민학교 운동회에서 ‘청군 홍군’이 대결했지만 1960년대 이후 그것은 ‘청군 백군’ 대결로 대체되었습니다. 빨간 색은 공포의 색깔이었습니다. 새누리당의 당색이 빨개졌음에도, 빨간 티셔츠 차림의 ‘붉은 악마’의 응원이 하늘을 찔러도, 인터넷 댓글난이 ‘빨갱이’라는 단어로 도배질 되는 것이 21세기의 한국의 자화상입니다.

그때 ‘인민’ ‘동무’라는 낱말을 쓰면 간첩으로 오인 되었습니다.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으로 배웠던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도 어느 날부터 ‘국민’으로 바꿔야 했습니다. ‘동무생각’은 국민학교 음악시간에 배운 박태준 작곡, 이은상 작사의 가곡인데,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라는 가사와 노래 제목 속의 ‘동무’ 때문에 금지곡이 됐습니다. 학문용어로서 ‘인민’은 회복되었으나 ‘동무’의 회복은 아직도 요원해 보입니다.

남한이 이런 상호 부정적인 악순환의 경쟁 고리를 벗어난 것은 경제성장의 덕분입니다. 1980년대 이후 체제와 경제력에서 북한은 이미 남한의 경쟁 상대가 될 수 없었습니다. 남한이 개방을 가속화할수록 북한은 고립과 폐쇄로 역주행했습니다. 그 결과 남쪽에선 오는 12월 18번째 대통령을 뽑지만 북에서는 ‘3대 세습’이라는 ‘괴기 쇼’가 진행 중입니다.

이처럼 남한은 체제와 경제력 경쟁에서 승리했지만 그 역시 반쪽의 승리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결코 승리로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 우리 안에 엄존하고 있음이 이번 종북세력을 통해 드러난 것입니다.

종북세력은 자유민주 체제의 부스럼 같은 존재입니다. 그동안 유권자의 5% 미만으로 존재하다가 19대 총선에서 10%대로 늘어나면서 문제가 불거지고 있습니다. 이들의 약진은 정통 야당인 민주통합당과의 연대를 통해 사회적인 신용이 더해진 덕분일 것입니다. 이들로 인한 이념적인 혼란에 대해 민주당은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정부여당이 이들의 씨를 말릴 것처럼 대응하는 것도 과잉입니다. 군사정부 시절 폭압적 수단으로도 없애지 못했습니다. 이들을 키운 것은 체제에 내재하는 병적인 요소들입니다. 체제의 면역력을 키워서, 이들의 영향력을 최소화 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제 기능을 못하는 식물정치가 '안철수 현상'을 초래했듯이, 종북세력 또한 체제 수호의 일차적 책임이 있는 여야와 정부의 무능에 있습니다. 국민의 눈에 아무 것도 아닌 이유로 국회 원구성도 미룬 채 놀고 있는 정당들의 모습에서 책임의식은 볼 수 없습니다.

여야 모두 뿌리가 보수정당이면서 상대를 공격하는 말의 폭력은 ‘타도 대상’ ‘패악무도’처럼 북한이 남한을 공격할 때 동원하는 막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반정부를 넘어 반체제 수준입니다. 이런 정치가 종북세력을 키운 토양입니다. 어느 정당이 집권하든 다 잘할 수는 없고, 다 잘못하지도 않습니다. 잘한 것은 계승 발전시키고, 잘못한 것은 버리고 고치면 됩니다.

종북세력이 민족에게 끼치는 가장 큰 해악은 북한의 변화를 가로막는 구실이 된다는 점입니다. 북한의 집권세력은 남한 내의 종북세력을 이용해 그들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고, 내부를 단속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들이 적화통일의 환상을 버리지 않는 근거도 된다고 봅니다.

6·25를 앞두고 종북세력이 기억 할것은 해방정국과 6·25를 전후한 남로당과 당수 박헌영의 행적입니다. 박헌영은 남한에서 공산혁명을 이룰 수 없게되자 북한으로 넘어갔고, 김일성과 함께 소련의 스탈린을 찾아가 남침허락을 받기 위해 날뛰었습니다.

휴전 후 김일성은 전쟁이 나면 남한에서 폭동이 일어나 순식간에 통일이 된다는 박헌영의 거짓말에 속았다고 개전 책임을 떠넘겼습니다. 그리고 ‘미제의 주구(走狗)’로 몰아 발가벗겨 투옥시킨 뒤 사냥개에 물려 죽게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를 따라 ‘종북’했던 많은 남로당원들도 그 때 처참하게 숙청됐습니다. 종북을 하더라도 북한에서 살 생각은 말기를 바랍니다.

종북세력에 대한 궁극적인 심판은 국민의 몫입니다. 그들의 다음 행태가 무엇일지 예의 주시해서 다음 대선과 총선에서 엄중한 심판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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