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신문] 언론인들의 친목단체인 관훈클럽이 매년 주최하는 해외문화탐방단의 일원으로 지난달 말 올해 방문지인 중국 산동(山東)성을 다녀왔습니다. 산동성은 지리적으로 남한과 가장 가까워 흔히들 산동성 동쪽 끝 영성(榮成)의 닭울음소리가 충남의 당진에서 들린다고 얘기할 정도입니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도 이곳에 가장 많아 2만여 개나 됩니다.

이곳은 황하문명의 발상지이고, 춘추전국 시대 제(齊)나라가 제남(濟南)을 수도로 삼은 이후 오랜 세월 중국의 정치와 문화의 요람이었습니다. 진시황을 비롯한 70여명의 황제들이 이곳 태안(泰安)에 있는 태산(泰山)에 올라 떠오르는 해를 보고 제사를 지냈다고 해서 해발 1,532m밖에 안 되는 이 산은 중국의 5악 중에서 으뜸입니다.

케이블 카로 이 산에 오르면서 교과서에 실린 ‘태산이 높다하되...’로 시작되는 양사언의 시조로 인해 태산을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알았던 어린 시절이 다시 생각나 쓴웃음이 나왔습니다. 이 산 정상의 바위에 덕지덕지 썼거나 새긴 붉은 페인트 글씨들이 자연 파괴의 상징이 아니라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게 나를 어리둥절케 했습니다.

산동의 자동차 번호판의 지역표시 글자가 노(魯)인 것은 전국시대 공자의 나라인 노나라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인데 공자의 고향 곡부(曲阜)에 있는 공묘(孔廟) 공림(孔林) 공부(孔府)의 거대 유적과 함께 중국인의 공자에 대한 자부심의 크기를 알게 하면서, 유교가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미친 영향도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됐습니다.

영성시의 적산(赤山)에는 신라시대 해상왕 장보고(張保皐)의 기념관이 있고, 그가 세웠던 절 법화원(法華院)이 일본인들의 손으로 복원돼 있었는데 조상의 기상을 직접적으로 대할 수 있는 유적지라는 데서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이들 유적지보다 근세에 세워진 유적지가 위해(威海)의 유공도(劉公島) 청일전쟁기념관이었습니다. 중국의 패전의 기록을 전시해 놓은 이 기념관의 전시물은 중국어 영어 한글 세 가지 언어로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일본군의 전승유적지를 찾아다니기 좋아하는 일본 관광객들을 생각한다면 덜 상업적이지만, 중국식 오기(傲氣)로 여겨졌습니다.

그 오기가 박물관 마지막 전시실의 ‘남기는 말’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이 전쟁은 낙후되면 망하게 된다는 도리를 다시 한 번 입증했다. ... 이 굴욕의 역사를 교훈 삼아 미래를 대비한 해상 강철장성을 구축함으로써 평화와 발전을 도모하고 역사의 비극이 재현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중국명으로 갑오(甲午)전쟁으로 불리는 청일전쟁 당시 유공도는 중국 북양함대의 최대 기지였으며 이곳에 진을 치고 있던 함대가 일본군의 기습작전으로 궤멸됐습니다. 그 해에 조선에서는 갑오농민전쟁(동학란)과 갑오경장이 있었습니다. 농민전쟁으로 분출된 백성들의 불만을 수습하기 위해 조정에서 내놓은 개혁안이 갑오경장이었습니다.

갑오농민전쟁은 청일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었습니다. 동학란을 진압할 목적으로 조선이 중국에 군대 파견을 요청하자, 일본도 조선에의 동시적 군대파견을 규정한 청일간의 천진(天津)조약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했고, 조선의 서해상에서 시작된 양국의 충돌이 중국 본토로 이어져 청일전쟁이 된 것입니다. 이 패전으로 청나라의 쇠망은 가속화했고, 일본은 이후 러일전쟁(1904~1905)마저 승전해 조선의 국권을 빼앗고, 1910년 끝내 병탄했습니다.

청일전쟁의 강화(講和)조약인 시모노세키(下關) 조약을 통해 중국은 요동(遼東)과 대만(臺灣) 팽호도(澎湖島)를 일본에 할양하고, 당시 돈 3억6,400만 엔(일본 예산의 4년 분)의 전쟁배상금을 지불했습니다. 그 중 요동반도는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간섭으로 중국에 반환했고, 그것이 뒷날 러일전쟁의 원인이 되는데, 요즘 한중일러 간의 독도, 북방4도, 조어도(釣魚島) 등을 둘러싼 영토분쟁도 실은 이 두 전쟁에서 배태된 것입니다.

그런데 뼈아프게 되새길 일은 시모노세키 조약의 제 1조가 ‘청은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승인하고, 청에 대한 조선의 조공을 완전히 폐지한다’였다는 점입니다.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달린 영토할양은 2조, 전쟁배상금은 4조였습니다. 제 1조가 ‘조선의 병탄’이라는 더 큰 미래의 이권을 노린 일본의 정교한 술책이었음을 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조선이 청으로부터 독립한 것의 의미가 적다는 것은 아닙니다. 고종이 고종황제로 불리고, 민비가 명성황후가 된 것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독립문이 세워지고 독립신문이 창간된 것도 그 무렵입니다.

그러나 독립은 누가 시켜줘서가 아니라 내가 쟁취할 때 내 것이 됩니다. 내실과 능력이 없이 그런 겉차림의 명분만으로 독립을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청의 속박에서 벗어난 후 독립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우리 내부의 주체적인 각성과 노력이 과연 얼마나 있었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사회적인 분위기가 두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의 욱일승천 기세에 눌려 있는 채 개화파와 수구파 간의 정쟁은 끝을 몰랐고, 독립을 찾게 한 일본에 대한 호의와 친일=개화발전이라는 생각만 넘쳐났을 뿐 그것이 더 굴욕적인 예종의 길이 될 것이라는 점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요?

그로부터 110년도 더 지난 지금은 어떻습니까? 일본이 시들고, 중국이 욱일승천하는 기세로 역전됐습니다. 그렇다고 지금이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의 땅 따먹기 식의 약육강식의 시대는 아니고, 일본이 '지는 해'라지만 청조 말의 중국은 아닙니다.

중국이 잘사는 것은 가난한 것보다 백번 나은 것이지만, 중국이 그 부를 기초로 패권을 추구하는 것은 주변국은 물론 세계가 경계하는 것입니다. 한국과 중국은 서로에게 필수불가결의 상대가 됐어도 중국이 패권을 추구하게 되면 한국은 이웃 국가들과 함께 그것을 막아야 합니다.

중국과 잘 지내야 하는 것만큼 주변국과도 잘 지내야 합니다. 한국은 그 역할을 할 만한 민주적 경제적 역량을 갖고 있습니다. 100년 전보다 나빠진 부분이 있다면 남북의 분단 상황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가 풀어야 할 방정식이 한층 어렵게 돼 있습니다.

분단을 극복하고, 나아가 그것을 우리의 강점으로 만들면서 통일을 이루고, 이웃들이 화평하게 살게 하는 역할을 한국이 해내야 합니다. 그것을 가능케 할 힘의 원천은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정치인으로, 외교관으로, 군인으로, 상인으로 큰 역할을 해낸 장보고의 국제감각과 기업가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낙후하면 망한다’는 유공도 청일전쟁기념관의 경구가 우리의 경구도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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