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인 김영환

[중소기업신문] “중앙청에 태극기를 달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종군기자 박종환으로부터 중앙청 태극기 게양에 경쟁 움직임이 있음을 들은 국군 해병대 2대대 6중대 1소대장 박정모 소위가 대대장 김종기 소령에게 결의를 밝히자 대대장은 연대장 신현준 대령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9월27일 새벽 3시 박 소위는 대대본부인 조선호텔의 직원들을 동원해 마련한 대형 태극기를 배에 둘러 감고 돌격에 나섰습니다. 최국방 수병이 깃봉을 들고 2미터 거리에서 따라왔습니다. 소대는 20미터 간격으로 촘촘하게 설치된 인민군의 모래주머니 진지를 헤치면서 세종로를 따라 중앙청으로 향했습니다. 기관총탄과 박격포탄만이 어둠을 가르는 가운데 박 소대장은 수류탄을 던지며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잔적의 저항을 제압하고 아직 검붉은 연기를 내뿜는 중앙청 건물 돔의 끊어진 철사다리를 군용 요대로 이어가며 올라가 마침내 태극기를 게양했습니다. 1950년 9월27일 오전 6시10분, 적 치하 석 달,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지 12일만의 일이었습니다. 이튿날 서울은 완전 수복되었고 시민들은 성당의 종소리를 다시 들었습니다. 신문들은 6ㆍ25 발발 이후 휴간한 지령을 이어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되찾은 자유대한은 고귀했습니다.

9월15일 유엔군은 인천에 상륙했으나 서울로의 전진은 지지부진했습니다. 도처에 북한군이 설치한 바리케이드와 지뢰 제거에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죠. 서울 서부의 안산에서는 일제가 만든 벙커에서 버티는 인민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습니다. 미 해병 1사단은 우회 작전으로 김포비행장을 거쳐 대안의 행주나루로 건넜습니다. 맥아더 원수는 개화산에서 해병대의 도하점을 직접 시찰했습니다.

국군이 평양을 되찾자 감격의 분위기가 넘쳤습니다. 중부의 산악지대를 진격하던 2군단 6사단이 38선을 돌파하자 참모총장인 정일권 소장은 10월7일 육본훈령 86호로 ‘북한 내에 있어서 국군의 행동원칙’을 하달했습니다. ‘1. 북한의 민간인은 해방된 형제이지 적이 아니다. 2. 장래 한국 국민이 되는 그들의 권리와 사적 의사, 공적 소유권은 존중해야 한다. 3. 국군은 북한 민간인의 수호자이다. 정복자가 아니다. …’라는 등의 내용으로 전면적인 승리를 내다보며 북한 통치를 준비하는 선언이었습니다. 단 2개월로 그쳤지만….

10월26일 파죽지세의 국군과 유엔군 가운데 가장 먼저 6사단 7연대 1대대가 중국과의 국경인 압록강 초산에 진격했고 초병은 사단장의 명령으로 압록강 물을 2개의 수통에 담았습니다. 이 대통령과 육군본부에 보내는 ‘압록강 물 헌수’였습니다. 신문들은 ‘태극기 국경에 휘날리다. 국군 압록강에 도달’이란 승전보를 톱뉴스로 전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0월29일 평양에서 역사적인 연설을 하게 됩니다. 그는 “이북동포 여러분 나와 같이 결심합시다. 공산군이 어디서 들어오든지 그것이 소련이건 중공이건 들어오려면 들어오너라. 우리는 죽기로 싸워서 물리치며 이 땅에서는 발붙이고 살지 못할 것을 세계에 선언합시다” 라고 절규했습니다.

불행한 예언처럼 중공군의 참전으로 1ㆍ4후퇴를 겪고 한반도 민주화 통일이 목전에서 좌절되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통일을 염원했던 이승만은 남쪽만을 자유민주주의로 구원하는 데 만족해야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젊은이들이 그렇듯이 박정모 소위도 파란만장한 삶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전남 신안군 도초면에서 태어난 그는 1944년 일본 후쿠오카 오리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명령으로 이듬해 1월 다나베(田邊) 해병단(海兵團)에 입대했지만 8월15일 일왕의 항복방송을 듣고서 부대를 탈출해 밀선을 타고 귀국했습니다. 다나베 해병단은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질 무렵 일본 정부와 군이 식민지 청년들을 전력화하기 위해 조선과 대만의 청년들을 특별지원병이라는 명목으로 강제 훈련시킨 조직인데 와카야마(和歌山)현 다나베 시에 본부를 두고 있었으며 미군의 공습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나라를 빼앗겼다가 되찾은 기쁨도 잠시, 자유를 유린하는 적군에 맞서 입대한 박정모 소위는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유의 상징물인 태극기를 중앙청에 가장 먼저 휘날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국군이 먼저 하기를 소원했습니다. 2차대전 때 망명정부를 세웠던 샤를 드골이 나치독일에 점령된 파리를 탈환하기 위해 르 클레르크 장군에게 어느 나라 군대보다 먼저 파리에 입성하도록 독려한 것과 똑같은 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중앙청에 유엔군보다 먼저 태극기를 달았고 인공기와 김일성, 스탈린 초상을 화염방사기로 불태웠습니다.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박정모와 부하들에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숨은 공훈"이라며 표창장을 보냈습니다.

6ㆍ25 남침 전쟁에서 교훈을 얻은 외교안보 전문가인 이승만은 휴전에 반대하며 ‘단독 북진통일’이라는 카드로 미국과의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이룩해 이후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를 유지하게 했습니다. 대한민국이 카이로선언으로 독립을 얻은 것도 큰 행운이었지만 유엔의 결의에 따라 가능한 지역에서 먼저 실시한 자유 총선거로 구성한 대한민국이 1948년 파리 유엔 총회에서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로  단독 승인을 받았기에 6ㆍ25 발발 당시 유엔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죠.

‘그들이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했던’ 코리아의 6ㆍ25 전쟁에 참전하여 서울 수복작전에 나섰던 미 해병 선발대는 9월 하순 행주나루 앞의 차디찬 한강물을 평영으로 건너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이제 사흘 뒤인 9ㆍ28은 젊은 세대들이 알고 있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은 날일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자유민주주의 승리의 날을 '9ㆍ28 서울수복 기념 마라톤' 하나로 ‘때우는’ 것은 역사에 대한 불경입니다. 전쟁은 유사한 상황에서 다시 발생한다고 합니다. 나라를 이끌려는 욕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외교안보에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할 이유입니다. 역사를 모르거나 잊어버린 사람들은 내일을 위한 비전을 결코 만들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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