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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건 칼럼) 일왕이 아니라 천황이라고?
2012년 11월 02일 (금) 09:37:30 임종건 webmaster@smedaily.co.kr
   
▲ 언론인 임종건

[중소기업신문] ‘일왕(日王)’이냐 ‘천황(天皇)’이냐의 논란은 사실 식상한 주제입니다. 최근 국사편찬위가 괜스레 이 문제를 건드려 사람들의 부아를 돋우고 있습니다. 국사편찬위 검정심의회는 내년도 중학교 역사교과서편수용어를 바꾸면서 ‘일왕’을 ‘천황’으로 표기하도록 했습니다.

천황 외에도 ‘을사늑약’은 ‘을사조약’으로, ‘일본군 위안부(성노예)’에서 ( )안은 빼고, 6·10항쟁 때 희생된 이한열 군의 피 흘리는 사진이 너무 선정적이라며 바꾸도록 했는데 여론이 반발하자 원래 것도 쓰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일왕->천황’ 수정은 강행토록 했다는군요.

그간 언론들은 이 문제와 관련, 일왕 천황 외에 왜왕 일황 일본국왕 등 여러 호칭들을 한일 긴장 수위에 맞춰 표기해왔습니다. 국사편찬위는 천황이 일왕의 높임말이 아니라 당시 정치체제상의 용어, 즉 일본의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천황으로 써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매우 식상한 논거입니다.

천황이 2차세계대전의 패배로 현인신(現人神)에서 내려와 ‘인간선언’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또 천황을 아직도 신으로 여기는 일본인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그러나 일본 사회는 전체적으로 패전 이전의 일본, 즉 천황을 앞세워 이웃나라를 침략했던 제국 시절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왕을 둔 나라에선 대개 왕과 왕족을 사랑하고 존경하면서도 왕가의 스캔들을 밥상머리의 화제로 즐깁니다. 그 점에서도 일본은 특이한 나라입니다. 천황가의 스캔들에 관한 보도는 금기 1호입니다. 천황을 잘못 받드는 듯 하는 정치인은 여야 없이 퇴출을 각오해야 합니다. 일왕 호칭에 대해 일본 정부와 의회가 보이는 알러지 반응에서 천황에 대한 향수를 봅니다.

제국의 천황은 ‘황제 중의 황제’, ‘하늘이 점지한(Devine)황제’라는 의미의 ‘덴노’입니다. 천황의 일가는 만세일계(萬世一系)입니다. 기원전 660년부터 현재 125대인 아키히토(明仁) 황제까지 2,672년이 지속됐고, 그래서 일본인은 천손(天孫)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중국 황제들이 천자(天子)라고 한 것에 대해 일본은 중국의 역대 왕조는 역도(逆徒)의 무리들이 권력찬탈을 되풀이 한 것에 불과하고 진정 하늘이 내린 황제는 천황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인종우월론’을 바탕으로 이웃나라들을 교화의 대상으로 보고 침략했습니다. 그 점에서 유태인을 학살한 나치와 크게 다를 바도 없습니다.

지구상에서 제국이 사라지고, 입헌군주제가 채택되면서 황제(Emperor) 호칭도 사라지고 국왕(King)만 남았습니다. 그럼에도 유일하게 ‘살아 있는 황제’로 남아 있는 게 일본의 천황입니다. '인간선언'과는 전혀 맞지 않는 호칭입니다. 일본이 침략을 속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제국주의 향수를 못 버리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가 먼저 천황을 고유명사라고 의미를 축소하는 것은 섣부릅니다.

최근 일본 야스쿠니 신사를 관광한 친지의 목격담입니다. 신사 정문 앞에 ‘대동아전쟁(미일전쟁) 개전 70년전’이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더라는 것입니다. 교복을 입고 수학여행을 온 어린 학생들이 그 밑으로 지나더라고 했습니다.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침략전쟁을 기념하게 하는 일본은 우리에게 무엇인가요?

게다가 자민당의 우익 성향이 미적지근하다고 뛰쳐나와 무소속으로 도쿄 도지사를 4연임한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지사가 최근 극우 신당을 만들겠다며 지사직을 내놓았습니다. 같은 성향의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 시장은 보다 앞서부터 의회 진출을 노리고 있고, 두 정당은 연합할 것이라고 합니다. “종군 위안부는 매춘부”, “일본은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이들의 정치등장은 또 무엇을 의미합니까?

일제말기의 극심했던 이 땅의 조혼 풍습이 군대위안부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그 시대의 모든 증언은 위안부 징용이 딸을 둔 부모와 어린 여성들을 얼마나 공포케 한 반인륜적 범죄였는가를 말해줍니다. 얼마 남지도 않은 직접적인 희생자들은 그 피해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것입니다.

일본이 독일과 달리 전쟁 범죄 사죄에 인색한 것은 전쟁 중에 나치처럼 수백만 명의 무고한 시민을 수용소에서 학살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에 끌려가 총알받이로, 노역장에 끌려가 학대와 착취 속에 죽어간 수백만의 우리 동포는 창살 없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것입니다.

식민지배에 대한 평가에서도 그들은 ‘조선의 공업화’에 기여했다고 생색을 냅니다. 그러나 본래의 목적은 대륙 침략의 발판을 놓는 것이었지, 조선의 공업화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조선인의 인적 물적 자원을 착취한 결과를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선후 인식이  비뚤어진 견강부회입니다.

일본의 제국주의 향수는 ‘조선반도’라는 표현에도 들어있습니다. 일본은 남북이 분단돼 국호가 다름을 구실로 '한반도'가 아닌 '조선반도'라고 부릅니다. 분단 전의 조선반도는 일제 시대의 조선반도입니다. 이 문제는 분단을 구실로 삼기 전에 수교국인 한국과 미수교국인 북한과의 관계에 따라, ‘한반도’ 표기가 마땅하다 할 것입니다.

이처럼 인정할 것을 인정하지 않고, 버릴 것을 버리지 않는 일본이기 때문에 천황이라는 호칭에서 부끄러움 대신 신성부활(神性復活)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모든 나라 사람들이 천황이라고 부르더라도 일왕이라고 부르는 나라가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보며, 한국이 그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들로부터 가장 모진 침략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일 간에는 독도, 교과서, 종군위안부 문제가 시도 때도 없이 터집니다. 김대중 정부 때는 천황으로 부르기로 공식발표를 하기 직전에 이를 취소한 일도 있었습니다.

언제 어떤 사태로 격앙된 여론이 ‘천황이 웬 말이냐’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 때 또 바꾼다고 할 것입니까? 전처럼 일왕으로 쓰도록 놔두던지 아니면 최소한 일왕과 천황을 함께 쓰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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