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행산 논설위원>

2008년 8월15일은 63주년 광복절이자 60주년 건국절이다. 그러니까 올 8월15일은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예순세 해째 되는 날이면서 아울러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탄생을 세계에 알린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회갑 날’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광복절은 있지만 건국절-곧 건국기념일은 없다. 나라가 세워지고 환갑이 되도록 이 나라는 무슨 까닭인지 건국일을 국가 공식기념일로 지정하지 않고 있다.

1948년 당시의 해방정국은 어수선했다. 북한지역에서는 이미 해방 이듬해인 1946년 2월9일 북한 단독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창설하고 사회주의 헌법 제정과 토지개혁, 산업 국유화, 화폐개혁, 군대 양성 등을 추진했다. 우여곡절 끝에 건국된 대한민국은 북한 인민공화국보다 2년 반이나 늦은 1948년 8월15일에야 건국을 선포할 수 있었다.

이에 앞서 1948년 7월20일 헌법에 따라 초대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출하는 투표가 국회에서 실시됐다. 이 투표에서 이승만은 출석의원 196명 중 180표라는 절대적인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고, 부통령 선거에서는 성재(省齋) 이시영이 133표를 획득해 62표를 얻은 김구를 누르고 부통령에 당선됐다. 그리고 7월24일 대한민국의 첫 정・부통령이 취임했다.

이시영(李始榮)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삼한갑족(三韓甲族. 신라・고려・조선 3조에 걸쳐 문벌이 높은 명문가)인 경주이씨 백사공파 집안 출신으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11세손이다. 백사공파는 이항복 이래 9대에 걸쳐 9명의 영의정과 1명의 좌의정을 배출한 조선조 최고의 명문가다. 이시영의 아버지 이유승(李裕承)은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나라가 망하자 이시영의 여섯 형제는 지금의 서울 중구 일대 2만여 평이 넘는 땅과 물려받은 전 재산을 남김없이 처분한 뒤 1910년 12월 60여명에 이르는 대가족을 열두 대의 마차에 나누어 태우고 동토의 땅 만주로 망명을 떠났다. 이 망명을 주도했던 인물이 넷째인 우당 이회영(友堂 李會榮)이었으며, 이시영은 다섯째였다.

한 달여 만에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에 도착한 이들은 인근의 땅을 매입, 기업농장 비슷한 경학사와 부설 교육기관인 신흥강습소(훗날 독립군 양성 중추기관인 신흥무관학교로 개편)를 설립했다. 경학사의 대규모 농장은 굶주림을 피해 만주로 이주해온 조선인들에게 농사지을 농토를 제공했고, 신흥무관학교에서 배출된 3천여 명의 독립군들은 훗날 봉오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일본 정규군을 대파한 핵심전력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가지고 온 자금이 바닥나자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는 경영난에 처하게 됐고, 이시영 형제들도 중국의 빈민가를 전전하며 아이들 옷까지 팔아 겨우 연명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우당 이회영 형제들은 굴하지 않고 연해주와 베이징, 상하이 등을 전전하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이회영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옥사하고 말았다.

이회영뿐만이 아니었다. 이들 여섯 형제와 가족들은 모두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사하거나 굶주림과 병으로 죽고 해방 후 이시영만 살아서 귀국해 대한민국 건국 부통령이 된다. 그 이시영 건국 부통령이 지금 수유리 북한산 기슭에 쓸쓸히 잠들어 있고, 99세의 늙고 가난한 며느리가 지난 세월 수십 번도 넘게 전월세 방을 전전하며 그 묘소를 지키고 있다.

큰비가 내리면 건국 부통령의 유족들은 묘소가 쓸려 내려갈까 걱정이 돼 밤잠을 못 이룬다고 한다. 대한민국은 저절로 세워진 나라가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절망적이던 땅에서 오늘의 세계 13위 경제대국이라는 민족사의 대기적을 반세기만에 가능하도록 그 초석을 놓은 대한민국 건국 부통령의 묘역은 당연히 국립묘지에 조성돼야 옳다. 대한민국이 제대로 된 나라라면 건국 부통령을 이렇게 대우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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