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인 임종건

[중소기업신문] 지난 4월 8일 작고한 마거릿 대처 전 영국총리의 11년 6개월에 걸친 장기집권의 명운이 끝나갈 무렵인 1990년 나는 연수를 위해 영국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럽공동체(EC) 가입을 둘러싸고 영국 사회는 집권 보수당과 야당인 노동당 사이는 물론 집권당 안에서도 찬반이 갈려 4분5열 돼 있었고, 게다가 대처 정부가 국민 개세(皆稅)주의에 입각해 도입한 인두세(Poll Tax)에 반대하는 시위로 거리는 연일 최루가스로 차 있었습니다.
 
EC가입에 반대했던 대처는 그해 11월 끝내 사임했습니다. 그 후로도 보수당의 집권은 후임 존 메이저 총리의 7년간을 포함해 장장 18년간 지속됐으나 EC에 가입하고, 인두세를 폐지하는 등 상당수 대처의 정책들은 버려졌습니다.

1997년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총리로 정권교체가 이뤄져 10년간 집권했고, 그의 후임 고든 브라운 총리의 3년을 포함하면 노동당 집권도 13년 동안 지속됐습니다. 특히 블레어 총리는 대처의 정책들을 대부분 수용함으로써 생전의 대처 총리는 블레어를 ‘진정한 후계자’라고 추켜세우기도 했습니다.

대처는 스스로를 ‘합의의(Consensus) 정치인’이 아니라 ‘확신의(Conviction) 정치인’이라고 했습니다. 좌파적 요구와는 타협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의 별명이 철녀(Iron Lady)인 까닭입니다.

대처 사후 생전의 공과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근년 들어 자본주의의 위기가 얘기되는 분위기 때문인지 대처리즘이 그 위기의 진원지인 듯이 주장하는 목소리가 크게 들렸습니다. 그러나 대처가 총리로 취임하던 1979년 이전의 영국을 돌이켜 본다면 누구도 ‘영국병’을 치유한 대처리즘의 공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당시 영국은 고비용 저효율 고복지가 빚어낸 ‘영국병’으로 3류 국가로 전락할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복지정책으로 정부 재정은 펑크 났는데, 국민들의 복지 요구는 갈수록 커졌고, 그런 분위기를 업고 노조는 파업을 일삼아 경제침체와 사회불안이 가중되고 있었습니다. 1976년에는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지경에 빠졌습니다.
 
대처 총리는 복지를 축소한 총리로 비난을 받았지만 영국은 아직도 60여 가지의 각종 보조금 제도를 갖고 있고, 그 중에는 우리에겐 생소한 장례보조, 과부 홀압비보조, 0도 이하 기온이 1주일 이상 지속 될 때 지급되는 난방보조, 장례보조, 교복보조금 등도 있습니다.

지금도 시행되고 있는 영국의 아동보조금 제도에 따라 나의 두 아이에게도 주당 10여 파운드씩 지급됐습니다. 1년의 단기 체류 외국인에게도 자국민과 똑같은 혜택이 주어지는 것을 보고 인류애에 바탕한 보편적 복지를 실천하는 영국은 역시 큰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대처는 잡화상 집의 딸로 태어나 근검 절약 금욕 등 빅토리아 시대의 가치관 속에서 성장한 탓인지 지나친 복지는 국민을 타락시킨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의존적 사회에서 자립적 사회로, 해달라는 국민에서 스스로 하는 국민으로(from a dependent to a self-reliant society, from a give-it-to-me to a do-it-yourself nation)”라는 총리 취임 직후 행한 연설에 그의 생각은 잘 드러나 있습니다. 포퓰리즘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국민의 헌신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그의 연설은 영국 처칠 총리나 미국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연설과 동격(同格)입니다.
 
그런 정신적 바탕에서 나온 것이 ‘작은 정부’ 정책이었습니다. 그는 케인즈 류의 정부개입이 영국경제의 침체원인이라고 보고, 소득세의 감면, 기업에 대한 규제철폐, 법과 질서의 확립, 공기업의 민영화, 기술교육 및 직업훈련 강화와 같은 처방을 내놓았던 것입니다.

영국의 EC가입 반대와 관련해 그는 유럽 대륙에서 시작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수습하느라 영국은 희생만 치렀다며, 그래서 대륙과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늘의 시각으로 볼 때 기우였다고 하겠으나, 그런 생각의 배경에는 통합된 유럽이 나치 식의 전체주의로 흐르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깔려있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유럽보다는 미국과 가까워지고자 했고, 때마침 미국에서 같은 이념성향의 레이건 대통령이 등장하면서 대처리즘은 레이거노믹스와 함께 보수주의 양대 축(軸)이 되었습니다. 공산주의와 전체주의에 반감을 지녔던 두 사람이 소련의 붕괴라는 세기적인 사건의 주연을 맡게 된 것은 역사의 섭리처럼 여겨집니다. 공교롭게도 만년을 치매로 보냈던 두 사람이 저승에서 해후하여 이승에서의 영광된 순간들을 떠올리며 기억을 되찾았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대처리즘이 공격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대처리즘의 근간을 형성하는 시장주의로 인해 빈부격차가 심화됐다는 점입니다. 그 점을 전적으로 부인할 수는 없지만, 빈부의 문제는 정부의 개입으로 모두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도 사실입니다.

정부개입은 집중과 선택 그리고 효율이 중요할  뿐 언제나 최소화가 바람직합니다. 정부의 과도한 개입은 시장주의 이상으로 위험합니다. 오히려 근검절약과 같은 대처리즘의 가치가 시대나 개인의 차이를 초월해서 빈곤을 벗을 수 있는 출발점이 아닐까요?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속담은 여전히 진리입니다.
 
자본주의의 폐해에 관한 한 우리사회에 매우 심각한 문제들이 쌓여가고 있습니다. 부유층의 탐욕이 도를 넘고, 보편적 복지라는 이름의 포퓰리즘 정책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정규직 노조의 귀족화 현상, 특히 비정규직을 깔고 앉은 기득권 지키기가 위험수위에 있다고 봅니다.
 
대처 총리는 “노동당이 보수당처럼 자본주의 정당이 될 때까지 나의 임무는 끝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보수당과 노동당의 정강정책이 비슷해진 영국에서 대처리즘은 성공한 셈입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대처리즘이 필요한 나라가 정작 어느 나라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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