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국정원이 공개한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의 정상회담 대화록 전문을 읽고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대통령 못 해 먹겠다”고 한 노무현 대통령의 어투였습니다. 당시 그가 “야당의 협조가 없어 국정 수행이 너무 힘들다”라고 했으면 어땠을까요?
 
노 대통령의 실언은 그 후로도 이어졌고, 야당들은 ‘그러면 못 하게 해주지’하는 오만으로 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가결시켰습니다. 탄핵은 역풍을 불러와 이어 실시된 총선에서 노 대통령이 창당한 열린우리당이 대승함으로써 그에게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긴 했습니다.
 
그의 어투가 점잖았다한들 야당이 협조적일 리는 없었겠지만 그래도 탄핵까지는 안 갔을 겁니다. 헌정사 초유의 탄핵 사태는 그의 누적된 어깃장 발언이 자초한 설화(舌禍)였습니다. 그가 했다는 북방한계선(NLL) 발언에서 비롯된 현재의 소동 또한 같은 맥락의 사태로 여겨집니다.
 
‘NLL을 포기한다’는 내용이 있느냐가 초점이었던 이 파동은 이제 엉뚱하게도 대화록 원본의 폐기 의혹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이번 파동의 최대 성과는 아이러닉하게도 원본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될 것 같습니다.

원본에 얼마나 많은 비밀이 더 있는지 몰라도 국정원 기록과 큰 차이가 나기는 어려울 것으로 봅니다. 그가 원본에서 설령 “나는 NLL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라고 명시적으로 말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국정원 기록에 나와 있는 실언들이 덮어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나는 노 대통령이 NLL을 포기한다는 말을 했을 것으로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런 말을 했더라도 그 말은 원천적으로 무효입니다. 영토에 관한 문제는 아무리 국가원수라도 국민의 동의 없이는 맘대로 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전쟁은 영토문제에서 비롯됐습니다. 휴전선과 마찬가지로 NLL도 6·25전쟁으로 그어진 해상 휴전선입니다. 그것이 '괴물'일 수는 없는 겁니다. 이것을 없애는 일은 육상의 휴전선을 없애는 일과 같습니다. 그것을 아무런 국민적 논의 없이 대통령 혼자 결정해도 되겠습니까?
 
만약 노 대통령이 NLL을 포기하는 말을 했다면 국민들은 대통령에 대한 신뢰 포기로 대응했을 것입니다. 평양에서 그런 말을 한 대통령이라면 서울로 돌아올 필요도 없다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나는 노 대통령이 그런 위험천만한 발언을 했을 만큼 무모하지는 않다고 보는 편입니다.

NLL이 남방한계선(SLL)이 아닌 것은 국군의 북진을 저지하기 위한 선이라는 뜻입니다. 6·25전쟁 기간 중 동서해의 제해권은 유엔군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섬들이 많은 서해에선 북한의 신의주 앞바다에 있는 섬들까지 유엔군의 점령 하에 있었습니다.
 
휴전협상을 위해 유엔군이 이 섬들을 포기하고 남하하던 중 전략적 요충지인 백령도를 비롯한 서해 5도에 이르렀는데, 그 곳이 바로 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에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 분할을 목표로 획정한 38도선 상에 위치했습니다.

육지의 휴전선은 동쪽에선 남한이 38선 이북으로 더 올라갔고, 서쪽에선 북한이 남쪽으로 더 밀고 내려왔으나, 서해 해상에선 원래의 38선으로 되돌아간 셈입니다. 유엔군은 NLL이북의 섬들뿐만 아니라 이남에 있는 섬들 가운데서도 육지와 가까운 대부분의 섬들은 북한에 돌려줬습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정전회담에 불참하면서까지 휴전을 반대한 것도 이런 유엔군 측의 양보에 대한 불만도 이유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북한도 휴전 이후 40여년 동안 NLL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인정해오다 90년대 이후 분쟁지역화를 시도하면서 수차례의 해전을 도발했고, 그것이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곳에 뭔가 변화를 줘서 평화지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남북화해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것입니다. 노 대통령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엄중한 과제냐 하는 것에 대해 노 대통령의 인식은 너무 안이했다고 하겠습니다. 퇴임을 앞둔 대통령의 성급한 성과주의 탓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김정일의 접근방법이 더 신중하고 노련했다고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김정일은 남한의 정세로 볼 때 ‘당신의 말이 남한 사회에서 통하겠냐’는 식으로 걱정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노 대통령은 ‘우리가 합의하면 나의 임기 내에도 다 치유된다. 반대하는 남한 사람은 인터넷에서 바보가 된다’는 식으로 큰소리쳤습니다.
 
그것은 기자실 폐쇄, 정부청사 이전, 혁신도시 정책을 추진하면서 그가 사용했던 대못질을 연상케 했습니다. 기자실 폐쇄 대못은 퇴임 즉시 뽑혔지만 국회와 지역이기를 대못으로 삼은 정부청사 이전과 혁신도시 정책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북한이라는 위험한 상대와 NLL이라는 위험한 바다를 놓고 대못질을 하려 한 것은 무모한 발상입니다. 남한 내의 친북세력을 대못으로 삼고, 인터넷을 이용해 반대세력을 제압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었다는 점에서 엄청난 국론분열과 사회혼란의 원인이 됐을 것입니다. 박아지지도 않은 대못을 놓고 정쟁을 일삼고 있는 현실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논란이 되고 있는 노 대통령의 NLL 발언은 실현 불가능한 대북 대화제의에 불과합니다. NLL 포기 발언이 있나 없나, 원본파기가 있나 없나를 가린다고 하지만 그것이 가려낼 수 있는 성격의 사안인지를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실에서도 여야 간 책임전가의 소모적 정쟁거리밖에 안 되고 있잖습니까.

새누리당은 18대 대선에서 이 소재를 실컷 우려먹었습니다. 국정원 국정조사를 물타기 하기 위해 재탕을 하려는 겁니까? 노대통령의 포기발언이 확인된다면 법적효력을 인정하겠다는 겁니까, 아니면 북한과 재협상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민주당은 NLL이 쉽게 포기할 사안이 아니라는 얘기 왜 못합니까? 국회에서 NLL 수호선언을 하자는데 왜 머뭇댑니까? 김정일 김정은에게 그렇게 오판을 하게 했다면, 많은 국민들에게 그런 오해를 안겼다면 그것은 잘못된 발언이라는 말을 왜 못합니까?
 
여야는 원인행위부터 무효인 사안을 놓고, 사실이 가려지지도 않고, 또 가려봐야 아무런 실익도 없는 정쟁을 언제까지 끌고 갈 겁니까? 국정원 기록만으로도 사태의 전말은 다 나왔다고 봅니다. 국정원 기록을 원본으로 보관하고 이쯤 해서 소모적인 정쟁 끝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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