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8·15 광복절은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방문에 이은 일왕에 대한 사과요구 문제로 한일관계가 긴장돼 있었습니다. 그 뒤로 한일 두 나라는 정권이 바뀌어 새로운 출발에 대한 기대가 높았으나 일본 우경화의 가속화와 정부 및 의회 고위 인사들의 잇단 망언으로 긴장 수위는 더 올라가고 있습니다.

지난주 일본의 진보신문인 아사히(朝日)신문이 사설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언행을 정치적 선동으로 규정하면서 현재의 긴장 상태를 초래한 출발점인 것처럼 주장했습니다. 독도 방문 자체보다 일왕을 직접 겨냥한 것에 일본사회가 속으로 분개하고 있다는 얘기는 천황가를 신성시하는 일본인의 정서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이명박 대통령의 언행이 없었다면 일본 측 망언도 없었을까요?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지난 중의원 참의원 선거에서 연이어 나타났듯이 자민당의 우경화 정책은 평화헌법의 개헌도 가능한 수준으로 광범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아베 정권은 오랜 경제 침체와 정치 불신에 지친 나머지 ‘뭐가 됐든 확실하게 해 보라’는 일본 내의 강박증적인 여론을 업고 우경화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제동장치가 고장 난 열차의 질주와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8·15경축사에서 좋은 말을 할 처지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일본의 아베 총리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하지 않겠다고 했으나 돌아가면서 하기로 약속이라도 한 듯한 망언이 누구의 입에서 터져 나올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과거 우리 대통령들은 외교상의 중요도에 따라 취임 후 미국과 일본을 먼저 순방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중국이나 러시아를 방문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미국 다음에 중국으로 갔습니다. 다음 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G20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러 정상회담도 열릴 예정입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주변 4강 지도자 중 가장 먼저 한국 방문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박 대통령의 일본방문 일정이 아직 잡히지 않은 점입니다.

지난번 중국방문 때 습근평(習近平·시진핑) 주석과 한중일 정상회담을 연내에 갖기로 합의했습니다만 조어도(釣魚島)를 둘러싼 중일간의 긴장 또한 만만치 않아 성사 여부는 불투명합니다. 성사된다 해도 단둘이 만나는 것과 셋이 만나는 것은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한일 간에 이 같이 내용적으로 심각히 불편한 관계는 국교 정상화 이후 처음 있는 일입니다. 전통적인 우호협력관계에 비추어 한국으로서도 힘든 일이고, 국가적 자존심의 문제가 돼버린 일본으로선 더 할 것이라고 봅니다. 양국 간에 이 문제를 잘 풀어내는 노력도 필요해 보입니다.

그동안 일본은 주변국들과 불편하더라도 미국이 그들 편을 들어주면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는 일본과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강조하면서도 위안부 문제에 대한 반성을 모르는 자세에 대해 되풀이 비판의 소리를 냈고,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 겸 재무상의 나치식의 헌법개정 발언이 알려지자 아연하는 분위기입니다.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고, 자국의 무기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의 무장화를 부추겨 온 측면도 있지만 2차 세계대전을 통해 혹독한 희생을 치른 경험도 있어 본격화하는 일본의 무장화를 그저 바라볼 수만은 없는 입장입니다. 한국과 중국을 비롯해 동남아 지역의 국가들이 반대하는 일본의 우경화 현상을 미국만이 지지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지난 달 잠실경기장에서 벌어진 동아시아축구대회 남자부 한일전 때 붉은 악마 응원단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쓰인 대형 현수막을 내걸었습니다. 이 말의 출처가 단재 신채호라는 얘기가 있으나 단재는 결코 그런 기록을 남긴 바가 없습니다. 단재가 망국의 한을 담아 조선상고사의 서문에 쓴 ‘영토를 잃으면 재생할 수 있으나 역사를 잃으면 재생할 수 없다‘는 말의 변형이 아닐까 합니다.

단재의 말이건 아니건 간에 이 말에 함축된 의미는 역사를 소중히 여기라는 자계(自戒)입니다. 한국에도, 일본에도, 모든 나라, 모든 민족에게 통하는 보편적 진리입니다. 다소 정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면 그것은 일본의 응원단이 제국주의 일본군의 군기였던 욱일승천기를 경기장에 가지고 들어오는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는 점입니다. 일본은 그런 자극적 행동을 자제케 함이 없이 오히려 정부 차원에서 욱일승전기의 사용을 공식화 하도록 법을 바꿀 것이라고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일본 축구협회가 동아시아 축구연맹에 스포츠에서 정치적인 선전을 했다며 항의서한을 전달했습니다. 시모무라 하쿠분(下村博文)문부과학상은 “한국의 민도가 문제될 수 있다”는 얼토당토않은 망언까지 했습니다. ‘하쿠분’이란 이름은 더욱 기분 나쁘게도 이등박문의 ‘박문’이었습니다.
 
이 말에 맘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것은 도둑이 제발 저린 격입니다. 세계의 모든 나라에게 교훈이 돼야 할 말이 일본에게 만은 그렇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동아시아 축구연맹은 이 문제를 논의하기 적합한 곳입니다.

지난해 런던 올림픽 남자부 축구 한일전을 마치고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소형 피켓을 들고 그라운드를 달린 박종우 선수에게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국제축구연맹(FIFA)은 역사에 무지하게도 벌금과 출전정지 징계를 했습니다. 축구협회는 제 발 저린 일본이 제기한 이 문제에 대해 일제침략의 공동피해 지역인 동아시아에서만큼은 그들의 뻔뻔함을 제대로 따져야 할 것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을 일본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한 사람이 싱가포르의 이광요(李光耀) 전 총리입니다. 그는 최근 출간된 자서전 '한 남자의 세계관'을 통해 일본의 미래를 평가하면서 “내가 영어를 할 줄 아는 일본의 젊은이라면 이민을 가겠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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