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29일 한국언론문화포럼(회장 임철순)이 ‘의회정치 쇄신과 언론 보도’를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이 세미나에서 국회 정치쇄신자문위원장을 지낸 정종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한국 정치의 난맥상에 대해 공감이 가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다수결원칙으로 운영돼야 할 국회가 의회선진화법을 명분으로 합의제를 택한 것과, 반대로 합의제로 운영돼야 할 정부의 경우 대통령이 승자독식의 다수결 방식으로 선출되는 것의 불균형이 근본원인이라는 얘기였습니다. 지금 새누리당은 의회선진화법 개정에 나선 상태입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그는 내각제 개헌을 제안했습니다. 정당들이 지분을 갖고 정부에 참여하는 내각제 외에는 현재의 지역대결 정치에서 합의와 화합을 이루기가 어렵다는 얘기였습니다. 맞는 처방이긴 하지만 원인에 대한 진단만큼 공감이 가지는 않았습니다.

지금도 당정 간에 제기되고 있는 개헌론은 내각제 개헌보다는 대통령 중임제 개헌 주장이 많은 편입니다. 그동안 개헌론의 진행과정으로 볼 때 어떤 형태로든 개헌이 성사될 가능성 자체가 희박해 보이고, 내각제 개헌이 이뤄진다 해도 야당이 여당과 책임을 공유하는 참여에 응할지도 의문입니다. 나에게 내각제 해결책이 공허하게 들린 이유입니다.

현행의 대통령제에서도 야당 출신의원을 각료로 영입하려던 시도가 있었습니다. 정국이 어려울 때면 거국 내각 얘기가 나왔고, 노무현 정부에선 대연정(大聯政) 얘기도 있었습니다. 야당으로선 책임질 일이 없이 밖에서 공격하는 편이 낫지 국민들에게 여당의 들러리 인식이나 심어주며 책임도 공유해야 하는 방법은 손해라는 생각 때문에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내각제로 연정이 제도화가 된다고 지금의 여야가 합의제 정부를 구성한다는 보장이 있을까요? 무책임한 공격에 익숙한 야당이 그들의 오래된 습성을 바꾸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현재의 여당이 야당이 된다 해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중부권이나 수도권에서 지렛대 역할을 할 정당이 나와야 그나마 내각제가 돌아가지 영호남 정당 간의 합작정부는 나오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헌정사에서 내각제는 2공화국에서 짧게 경험한 것을 제외하면 가장 근접했던 때가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와 김종필 전 총리 간의 이른바 DJP연합이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실제 각료의 일정 몫을 김종필 총리에게 할애하는 형식으로 정부를 구성했습니다. 그러나 김종필 총리의 내각은 1년여 만에 끝나고 맙니다. DJP연합의 핵심인 내각제 개헌 약속도 휴지 조각이 되고 맙니다.

사실 당시 DJP연합은 김대중 후보의 고육지책이었습니다.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한 적과의 동침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김대중 후보가 일방적으로 우세했다면 그런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각제는 그런 의미에서 세가 불리한 후보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선택하는 카드입니다.

그럼에도 일단 당선되고 나면 대통령은 권력을 나누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하고 싶어도 주변에서 강력하게 반발할 것입니다. 어떻게 잡은 권력인데 나눈단 말이냐고 측근들이 저항할 것입니다. 그것이 권력의 속성입니다.
 
그런 형식으로 내각제 개헌론은 생성 소멸을 반복해왔습니다. 내각제의 강력한 주창자였던 김종필 씨가 정계은퇴 한 이후 그나마 내각제 개헌론은 잦아들었습니다.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내각제 개헌을 들고 나오는 후보가 있다면 그는 약세 후보일 것입니다.

그 후보가 극복해야 할 최대의 과제는 유권자에게 DJP연합의 되풀이가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일 겁니다. 내각제가 일본에서처럼 정치불안의 원인이 될 것이라는 인식과 함께 권력을 잡으면 헌신짝처럼 버릴 속임수 카드라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팽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내각제 말고 다른 길은 없을까요? 영호남 이외에 수도권 충청권 강원권에서도 대통령이 나오도록 하는 길이 보다 현실적인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의 지역감정은 과거의 1인 장기집권과는 달리 여야를 막론하고 특정지역 출신의 대통령 후보 독점현상에서 비롯되고 있으니까요. 단순히 지역의 인구가 기준이 아니라 정치인 개인의 능력이 기준이 된다면 그런 재목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수도권에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날이 오게 됩니다. 지역대결도 수도권과 지방의 대결 구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수도권에서 영호남 후보가 힘을 합쳐야 대적이 가능할 정도의 강적이 나타날 수도 있을 겁니다.

이때도 영호남 후보는 서로 연합하기보다 상대를 따돌리고 각종 연고를 따져 수도권 후보와 연합하려 할 것입니다. 그래도 정치적 타협을 통해 영호남 후보 단일화가 실현된다면 내각제보다 훨씬 감동적인 지역화합의 장면이 될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어야 남북통일도 가능합니다. 나는 그런 날이 오기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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