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같으면 ‘별난 사람’소리를 들을 일이지만 40여 년 전 셋방살이를 면하고 13평짜리 아파트에 입주했을 때 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문패를 다는 것과 국경일에 태극기를 내걸 국기게양대를 설치한 것이었습니다. 나만이 아니라 그 시절 셋방살이를 하던 사람들은 대개 내 집 장만을 했을 때 집주인이 된 증표로 그렇게 하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 시절 집 주인의 이름과 주소가 들어 있는 문패를 다는 것은 초가집, 기와집, 아파트에 구별이 없었고, 도시와 농촌의 구별도 없었습니다. 대문이 있는 집은 대문에 걸었고, 사립문 집은 추녀 기둥에 달았습니다. 요즘은 다니는 성당, 교회, 절의 표시는 달아도 문패 단 집은 없습니다.
 
사실 시골은 문패가 필요 없는 사회였습니다. 누구네 집인지는 모두가 알았습니다. 이름만 아는 것이 아니라 찬장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를 알았고, 간밤에 누가 왔고 누가 갔는지를 훤히 알고 사는 사회였습니다. 도회지에서도 반상회가 있어 얼굴과 이름 정도는 알고 지내는 사회였습니다.

물론 빌라 동네의 대궐 같은 집들은 그때도, 지금도 문패가 없습니다. 돈이나 권력이 많은 것이 알려져 득이 될 게 없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에게나 소용이 되던 문패의 익명화가 모든 형태의 주택으로 보편화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아파트가 도시화의 상징처럼 인식되면서 나타난 현상인 것은 분명합니다. 집과 집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닭장처럼 붙어 있지만 그 안에 사는 사람 간의 마음의 거리는 외딴 섬들처럼 멀기만 한 기형적인 공동체로 바뀌었습니다.

실명은 촌스럽고 후진적인 것으로, 익명은 도회적이고 진보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 실명은 사생활 침해이고, 익명은 인권의 보호로 여겨집니다. 진보주의자들에 의해 익명은 민주주의의 필수요건으로 떠받들어지기도 합니다.
 
물론 익명이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내부고발자, 언론의 취재원, 범죄혐의자, 무고한 범죄피해자 등은 익명으로 보호돼야 합니다. 이처럼 익명의 보호는 예외적일 뿐 사회생활 전반에서 실명이 정상입니다.

익명을 보호해야 할 때도 익명이 남용돼서는 안 됩니다. 언론의 생명인 취재원 보호도 익명 취재원이 남용되면 기사의 신뢰가 떨어집니다. 범죄용의자도 범죄의 흉포성이나 긴박성이 인정되면 실명과 얼굴까지 공개하는 추세입니다.

그래서 익명은 희토류(稀土類)에 비유됩니다. 희토류는 극미량일 때만 기능합니다. 조금만 초과해도 전체 시스템을 망가뜨립니다.

인터넷 시대를 맞아 우리 사회에서 넘쳐나는 것이 익명이라고 하겠습니다. 익명일 경우 실명일 때보다 6배나 더 공격적으로 바뀐다는 조사 결과도 있습니다만 익명이 예찬되고, 과잉보호되어 사회전체가 망가질 상황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인터넷에 오르는 댓글들은 거의 모두가 익명입니다. 그 중에서도 이념, 지역, 계층, 정당 간의 갈등에 관한 댓글은 온갖 왜곡과 욕설의 경연장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헌법재판소가 인터넷실명제를 위헌이라고 결정한 나라이기 때문에 대책도 없이 방치되고 있습니다. 우편집배원이 배달의 편의를 위해 아파트 문에다 집주인의 이름이 쓰인 스티커를 붙였다가 사생활을 공개했다는 주인의 고발로 처벌을 받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초중고 학생 중에 욕이 없이는 대화가 안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이들에게 욕을 가르치는 대표적인 공간이 인터넷일 거라고 믿습니다. 국정원 댓글 사건이 개탄스러운 것은 이런 것을 막아야 할 정부기관이 그런 욕설판에 끼어들어 같은 짓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흔히 익명옹호론자들은 서구 사회에서의 익명보호를 옹호 주장의 근거로 듭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양이 기본적으로 실명의 사회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서양의 회사명은 창업자의 이름으로 된 것들이 태반이고, 개인의 우편함에 주소와 이름을 밝히는 것은 의무입니다. 익명으로 쓰는 인터넷의 댓글도 실명처럼 매우 절제된 언어로 돼있음은 물론이고 운영자에 의해 잘 관리되고 있습니다.

금융실명제 정책실명제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실명제는 투명사회, 책임사회를 위해 필수적입니다. 누구든 실명으로 자신을 표현할 때 신중해집니다. 그것은 언론 자유의 위축이기보다는 언론자유의 신중한 행사 쪽에 가깝습니다. 익명 뒤에 숨어서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것은 결코 언론자유일 수 없습니다.

욕설판에 건전한 여론이 끼어들 틈은 없습니다. 그래서 건전한 여론 형성을 저해하고 갈등만 증폭시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감정의 하수구’ 역할밖에 안 되고 있는 지금의 댓글 환경을 개선할 조치를 서둘러야 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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