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인 김영환

나름대로 오래전에 터득한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 건너기’ 방법이 있습니다. 차가 오는 반대 방향을 보고 걷거나 비 오는 날에는 우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건너는 것입니다. 이런 습관은 눈을 마주치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주행하지 좀처럼 서지는 않는 운전자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치자는 데서 시작되었죠. 선진 외국의 거리에서 보니 사람들이 차를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횡단보도를 건너는 게 부러웠는데 이것이 뇌리에 박혀 있다가 나도 그런 흉내를 내게 된 셈입니다.
 
몇 년을 그런 방식으로 건너왔는데 차들이 잘 서 주어서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개중에는 적개심이거나 혹은 살의(?)를 품은 것처럼 횡단보도를 건너는 내 앞으로 쏜살같이 달아나는 대형차들도 많았습니다. 아내는 “차를 쳐다보지 마라”하면 ‘이 사람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라고 비판하는 식입니다만 나는 ‘나를 치면 친 자는 대박 터지는 거지’라고 대꾸할 뿐입니다.
 
그런 나이기에 유치원생이나 초등생들이 고사리 손을 들고 학교 앞 횡단보도를 건너는 풍경은 안쓰러워 보입니다. 보행자의 권리를 운전자가 시혜를 베푸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횡단보도를 손을 들고 건너도록 가르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물건이 사람을 존중해야지 어떻게 사람이 물건을 존중해야 합니까. 그건 보행자가 차량을 무의식적으로 숭배하도록 가르치는 반 휴머니즘이고 반 환경적인 커뮤니케이션 방식이죠. 보행자가 손을 드는 게 신호가 아니라 사람 자체가 정지 신호라는 것을 차량들은 횡단보도의 소통방식으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죠.

‘소통’으로 말하자면 달리는 버스 안에서 자주 보는 풍경이 있습니다. 수도권의 한적한 버스 정류장을 지나는 운전기사들을 보노라면 정류장 부근에서 순식간에 앞문을 열었다가 닫는 광경을 봅니다. 승객이 몇 명이 서 있으니 ‘무정차 통과’라는 항의를 예방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수고를 덜기 위해 버스를 타고 싶은 승객은 적극적으로 손을 들어주는 게 어떨까요? 춘하추동,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우리 발 노릇을 해주는 운전기사에 고마움을 표시하는 인사로라도요. 대체로 노인들은 손을 들어 세우는 경우가 많지만 왜 저러고 살지 의문이 들 정도로 오뉴월에 모자 위에 두건을 뒤집어쓴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스마트폰에 취해 있는 청소년들은 무엇을 소통하고 있을지 의아스러운데요. 과연 눈앞에 다가선 버스에 탈까 말까 점 쳐보는데 기특하게도 잘 가려보고 타기는 탑니다.

늘 집무 책상 앞에서 마우스를 잡는 사진으로 국민들에게 익숙해진 고 노무현 대통령은 민생 탐방을 ‘이미지 정치’라고 보고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 가치관이 시정과의 소통을 외면한다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온라인, 오프라인을 불문하고 적절한 소통의 존중과 예절은 값진 공공정신으로 뿌리내려야 합니다.

만원 지하철에서 40~50리터는 됨직한 중·대형 배낭으로 사정없이 등을 밀며 승객을 뚫고 내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립니다’, ’지나갈게요‘ 한마디만 하면 눈치 빠른 시민들이 발을 좁혀 내리도록 길을 터줄 것인데 뭐가 기분 나빠서 차가운 배낭으로 밀치는 것일까요? 최근의 실업 때문에, 아니면 아내와의 불화로? 모든 게 불만일지 모르겠으나 그들에게 자연과의 대화보다 인간과의 대화가 먼저라는 생각이 듭니다.
 
말 한마디 하기 싫은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터를 오르고 내리며 웬 카카오나 웹 서핑에 그렇게 야누스적으로 열광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특히 못 참을 것은 붐비는 출구에서 인터넷에 푹 빠져 머뭇거리는 풍경입니다. 통로에서 앞서려 하면 못 가게 팔을 가로로 펼쳐서 막는 사람들도 보입니다.
 
거리의 운전도 말을 싫어하는 풍경입니다. 많은 차량들이 방향지시등을 켜지 않고 회전합니다. ‘나는 난폭운전자야’ 하고 치부를 드러내죠. 고속 주행 중인데 좁은 간격을 비집고 끼어들면서 방향지시등은커녕 급제동부터 하는 무례한 일도 자주 벌어지죠. 말이 인격이듯 차량의 말인 신호도 인격입니다. 정보를 공유해 서로 도움이 되는 것이죠. 때론 속도를 늦춰 끼워준 것을 감사하는 표시로 지시등을 오래 깜빡이는 운전자도 있지만 너무 길면 과공(過恭)처럼 느껴집니다. 고속도로에서 방향지시등을 안 켜고 대충대충 얼버무리는 사고방식이 세월호 침몰을 잉태하는 정신상태라고 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3진 퇴출제도’를 만들어 방향지시등을 떼내거나 운전면허를 정지시켜야 하지 않을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도 듭니다. 그래야 방향지시등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고 후회하게 될 테니까요. 파리에서 차를 몰 때 왼쪽 후사경(後寫鏡)이 안 달려 있어서 꼭 고개를 돌리고 뒤를 쳐다봐야 했습니다. 결국 한국식 운전에 익숙했던 터라 너무 불편해 후사경을 달고 말았지만…. 거울의 허상이 아니라 제 눈으로 실상을 보며 판단하라는 소통의 가르침이 어려웠던 것이죠.

거리에 불통이 넘쳐 시민을 위협하고 짜증 나게 합니다. 배려의 부족이 아니라 깜빡이를 안 켜면 범죄(도로교통법 38조 위반)입니다. 국민 신뢰도가 5.6 퍼센트인 잘난 국회의 정치인들이야 구름 위에서 자기들만의 언어로 살아가며 불통을 훈장처럼 자랑거리로 착각한다고 할지라도 서로 챙기고 살아야 할 시민들마저 이런 소소한 생활형 소통까지 외면하면서 그들의 흉내를 내면 되겠습니까? 즐거운 일이 드문 세상에서 남에게 깍듯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본 법질서는 지켜서 배려하는 모습이 아쉽죠. 불통은 남 탓하기 전에 나부터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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