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인 임종건

최근 나는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두 분이 같은 통계를 인용해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한 분은 내가 다니는 성당의 신부님이고, 다른 한 분은 젊은이들의 인성교육에 여생을 바치고 있는 교육계의 원로이십니다.
 
초등생 16%, 중등생 33%, 고교생 47%가 문제의 통계수치입니다. ‘10억 원이 생긴다면 감옥에 가겠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다는 초중고교 학생의 비율입니다. 포털에서 ‘고교생, 10억원, 감옥’이라는 검색어를 치면 ‘고교생 절반, 10억 원 생기면 감옥에 가겠다’는 제목의 글들이 뉴스, 카페, 블로그 등에서 와르르 쏟아집니다.

위의 수치는 작년 10월 흥사단 투명사회운동본부 윤리연구센터에서 실시한 청소년 정직지수 조사결과이자 가장 최근의 수치인데 2012년의 12%, 28%, 44%보다 높아졌다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비슷한 내용의 조사를 흥사단 외에 한국투명성기구에서도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해마다 수치는 올라가고, 상위 학교로 올라갈수록 수치가 높아지는 현상도 비슷했습니다. 학교등급이 오를수록 배 가까이 늘어나니 그런 비율이라면 대학생은 80%, 대학원 졸업할 때쯤이면 감옥행을 감행할 학생이 100%에 달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이는 어른의 거울이라고 합니다. 우리 사회의 부패현상이 어린 학생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런 정도인가 하는 데에 이르면 걱정이 커집니다. 신부님과 교육계 원로께서도 우리 사회의 부패구조의 심각성을 염려하면서 경쟁위주의 사회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 편에서 이런 조사결과가 얼마나 맞는 것인지, 이런 조사를 왜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무릇 여론 조사는 대상자가 잘 숙지하고 있는 내용을 물어야 정확한 답변이 나올 것입니다. 초중고생들은 10억 원의 화폐적인 가치나, 감옥의 실재적인 의미에 대해서 이해를 갖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가 아니겠습니까?

정확한 이해도 없고, 경험한 적도 없고, 또 결코 경험해서도 안 되는 내용에 대한 질문에 정확한 답변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다분히 작위적이고, 보기에 따라서는 어린 학생들을 희롱한다고 할 수 있는 이 질문에 학생들도 장난삼아 또는 호기심이나 영웅심으로 아무렇게나 한 대답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질문 가운데는 ‘인터넷에서 영화나 음악파일을 불법 다운로드 한 적이 있나?’ ‘시험을 보며 커닝한 적이 있나?’ ‘친구에게 참고서를 안 빌려주려고 거짓말을 한 적이 있나?’와 같이 나이에 어울리고, 자연스럽게 체험할 수 있는 유효한 질문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조사 결과를 보도하는 언론은 하나같이 ‘고교생 절반이 10억 원을 번다면 감옥에도 간다’는 제목을 답니다. 가장 학생답지 않아서 가장 자극적인 제목입니다. 그리고 짐짓 학생들을 타락케 한 현실을 개탄합니다.

그 질문은 어린 학생들에게 던지기에는 너무 난폭한 질문입니다. 조사 결과 또한 난폭한 일반화의 위험이 큽니다. 조사결과가 비록 정확하다 하더라도 보도자료보다는 참고자료로 남겨두는 편이 더 교육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임 병장의 총기난사 사건 때 어느 신문은 ‘상관을 쏴 죽이고 싶은 적이 있었다’는 제목의 기사를 전역 사병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 결과라며 보도했습니다. 군대에 갔다 온 사람 중에서 심정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런 감정은 이미 극복됐거나 한 때의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학생들을 부패 예비 집단으로 인상 지우고, 사병들에게 하극상을 자극하며, 범죄와 인명을 가볍게 여기게 하는 여론조사 설문이나 언론보도는 자제돼야 한다고 봅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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