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인 임종건

지난 달 필자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 나눈 대화를 정리해서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책을 낸 싱가포르 대학의 신장섭 교수가 연 출판기념회에 참석했었습니다.

대우 해체 후 15년 만에 김 회장이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고 언론들이 크게 보도했으나, '세계를 경영한 민족주의자 김우중’이란 저자의 김 회장에 대한 평가 이외에 대부분의 내용은 대우 해체 당시는 물론 그 후로도 많이 들었던 것들이었습니다.

‘민족주의자 김우중’이란 평가는 이 책의 저변을 관통하는 주제였습니다만, 대우 해체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그런 평가가 자리할 틈은 없었습니다. 그는 대우 해체로 국민의 세금인 공적자금 30조원을 들어가게 하고, 법원이 판결한 17조원의 추징금을 갚지 않은 부실기업인일 뿐이었습니다. 아직도 김 회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각인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민족주의적 기업가’로 평가받고자 하는 근거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는 1980년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밀리언셀러 저서를 통해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세계의 시장에 도전하라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번 저서의 부제가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여전히 젊은이들의 개척정신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보고 있는 듯합니다. 실제 그는 베트남에서 그런 사업가들을 양성하기 위한 글로벌 YBM(Young Business Manager) 사업을 필생의 과업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기업철학이라고 강조한 ‘기업발전과 국가발전의 동시추구론’도 모든 기업인들이 흔히 할 수 있는 얘기 같지만 김 회장에게서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기업을 키워 놓고 국가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시작할 때부터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김일성을 상대로 펼친 남북 화해와 북한 개방을 위한 그의 노력도 민족주의 차원에서 이해할만한 대목이었습니다.

그러나 해외시장 개척, 남북화해 노력과 같은 일은 현대의 고 정주영 회장이나 삼성의 이건희 회장을 비롯해 보다 내실 있게, 더 큰 규모로 실천한 기업인도 많기 때문에 김 회장만의 민족주의자 트레이드 마크로 내세울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다른 기업가들과 다르게 자신의 민족주의자적 면모를 확연히 드러낼 수 있는 요소는 없을까요? 그 문제와 관련해서 얼른 떠오르는 것은 김 회장과 IMF와의 관계입니다. 외환위기의 진단과 처방에 있어서 김 회장은 관료사회나 IMF 측과 대립적이었습니다.

IMF가 재벌의 문어발 확장 등 부실경영이 원인이라며 정부의 재정긴축, 기업의 부채감축을 처방한 데 반해, 김 회장은 한국기업을 흔들어 이익을 취하려는 외국자본의 의도된 공격이므로 확장정책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수출만 해도 원화가치가 크게 떨어진 지금이 수출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며 수출금융지원 확대를 주장했습니다. 장롱 속의 금모으기 캠페인도 그런 과정에서 나온 그의 아이디어였다고 책은 밝히고 있습니다.

문제는 김 회장이 대우사태의 해결을 위해서도 그런 확장주의적 처방을 요구했다는 점입니다.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관료들을 향해 그는 “능력이 없으면 그 자리에서 물러나라”고까지 말한 것으로 기술돼 있습니다.

IMF, 경제관료가 적대적이고, 언론도 우호적이지 않았던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대우가 살아남을 길은 없었습니다. 김 회장도 대우해체가 IMF와 IMF의 편을 든 경제 관료들의 협공의 결과였음을 책에서 되풀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한 데는 그만한 배경이 있었을 겁니다. 19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하던 때 김 회장은 병석으로 유고였던 최종현 회장을 이을 전경련의 차기 회장으로 사실상 재계의 대표였습니다.(정식 취임은 1999년 2월). 필자도 IMF 사태의 무거운 짐을 안고 취임한 김 대통령과 김우중 전경련 회장의 만남은 운명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대중 김우중은 성(姓)인 ‘김’과 마지막 이름자 ‘중’이 같고, 가운데 다른 두 자를 합치면 ‘대우’가 됐습니다. 두 사람의 궁합이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김 회장 특유의 달변과 세계시장을 누비며 터득한 사업수완에 비추어 IMF체제 속의 김 회장은 ‘물 만난 물고기’ 격이라고 여겼습니다.

전경련 회장은 이제나 그때나 대통령과 국회 정부 등을 상대로 대기업의 애로사항을 전달하는 로비단체의 장입니다. 과거엔 선거 때 정치자금을 모아서 전달하는 창구였습니다. 대통령은 요새도 전경련 회원들을 불러다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협조를 당부하거나 대통령의 해외순방에 들러리로 세웁니다. 김 회장은 성격상 그런 수동적인 역할에 머물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암울한 경제 현실 아래에서, 관료들로부터 답답한 얘기만 듣던 김 대통령에게 김 회장의 낙관적인 처방은 속을 후련하게 했을 겁니다. 청와대 관료들이 주관하던 경제대책회의에 유례가 없이 전경련 회장을 참석케 하고, 수시로 불러다 자문을 듣는 관계로 발전한 것은 당연했습니다.

1998년의 무역수지 흑자 400억 달러 달성은 김 회장에 대한 김 대통령의 신뢰를 더욱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관료들은 기십억 달러의 무역수지 흑자를 예측하며 IMF로부터의 독립은 빨라야 5년, 길면 10년 이상이 걸린다고 했었습니다. 김 회장은 1년에 500억 달러의 무역흑자도 가능하고 그러면 1~2년 안에 벗어난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이 맞은 겁니다.
 
김 대통령의 김 회장에 대한 신뢰가 커가면서 관료들로선 김 회장을 대통령으로부터 차단하지 않으면 정책을 수행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관료들의 김 회장에 대한 반격이 개시된 것입니다. 정부는 대우의 부실을 부풀릴 수 있는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습니다.

대우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현대 삼성 LG에 비해 국내는 물론 해외 시장에서 1등 제품이 없다는 것이었고, 당연한 결과로 자금사정이 가장 취약하다는 소문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김 회장의 ‘세계경영’도 부실을 은폐하려는 허장성세에 불과하다고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IMF도 정부를 거들어 ‘한국에서 더 이상 대마불사(大馬不死)가 통해서는 안 된다’며 대우를 겨냥했습니다.
 
그렇게 대우가 해체되고 나서 공적자금 30조원이 들어갔고 아직 절반 정도가 미회수 상태입니다. 김 회장은 자신에게 10조원만 지원했으면 해결될 일이었다며, 그렇게 허비된 돈으로 외국자본의 배만 불렸다고 주장합니다.

수출확대 정책으로 나라 경제는 살아나 외채를 갚기 시작하던 1999년 11월 대우는 끝내 해체됐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01년 한국은 IMF로부터 완전 독립했습니다. 그것이 대우 해체의 미스터리이자 아이러니였습니다.
 
관료들도 저마다 저서를 통해 부실로 인한 대우해체의 불가피성을 말했습니다. 그들의 주장도 김 회장의 주장만큼이나 논리 정연합니다. 그들은 김 회장이 하나를 주면 열을 더 달라고 하는 식으로 대우의 부실은 ‘밑 빠진 독’이었다고 했습니다.

지금 와서 누구의 주장이 맞는지를 가리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중요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나라가 IMF 신탁통치를 받는 마당에 일개 기업의 IMF에 대한 정면 도전이 통할 수 없으리란 것은 김 회장도 모르진 않았을 겁니다. 그것은 대우에게 특혜를 주는 것이므로 국내 정서상으로도 용납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경제주권의 상실이라는 전대미문의 사태를 맞아 대책도 없이 나라가 IMF에 끌려가고 있을 때 김 회장이 보인 '공허한' 저항의 몸짓을 ‘민족주의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남습니다. 또 같은 사태가 지금 재발한다고 할 때 한국이 외세에 흔들리지 않는 자주적 처방을 가질 수 있는 나라인가라는 문제도 남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민족주의의 토양인 외세의 간섭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도록 경제의 기초를 튼튼히 하는 것입니다. 원래 민족주의는 정치라면 몰라도 경제와는 궁합이 잘 안 맞는 사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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