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인 임종건

확률 1만분의 1의 사태가 만약의 사태입니다. 실제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일단 일어나면 재앙이 되는 사태입니다. 전쟁은 그중에서 대표적인 만약의 사태입니다. 6·25를 겪은 한국인에게 전쟁은 단순한 만약의 사태가 아닙니다.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막대한 돈이 듭니다. 정부의 내년도 국방예산은 37조원으로 전체 예산 대비 15% 수준이지만 1980년대까지만도 전체 예산의 30% 이상을 차지했습니다. 그래도 나라의 안보를 위한 투자로 여겨 국민들은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분단 이후 70년이 다 되도록 남과 북은 준 전시상황으로 끊임없는 긴장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진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일어나지 않은 전쟁에 대비해 엄청난 국력을 쏟아부었으나 그 덕분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위안은 됩니다.

남한 경제력의 40분의 1밖에 안 되고, 남한 인구의 절반밖에 안 되는 북한이 남한을 능가하는 군사력을 유지하려니 비효율은 남한보다 훨씬 더합니다. 비대칭 무기로 그 비효율을 줄이겠다는 생각에서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으나 국제적인 경제제재로, 비효율은 날로 가중되고 있습니다.

전쟁만큼은 아니지만 일상에서 겪게 되는 만약의 사태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공항의 보안검색대입니다. 해외여행 때마다 공항검색대에서 느끼는 것은 내가 테러범 같은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되고 있다는 찜찜한 느낌입니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2012년도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2011년 기준 연간 세계적 항공기 이용객이 3,800만 편에 28억 명으로 하루에 1만여 편의 여객기가 800만 명 가까이를 수송하는 꼴입니다. 이 숫자는 2015년에 연간 35억 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라고 합니다.

승객들은 공항 보안검색대를 통과하면서 보통 30여분 동안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고 겉옷과 신발도 벗어야 하고, 때로는 짐을 풀어서 내보여야 합니다. 금속탐지봉이 사타구니를 훑고 지나가고 공항에 따라서는 인권침해 논란이 되고 있는 X선 투시기를 통과해야 합니다.

승객들은 보안 검색에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범죄자일 수 없고, 여행의 안전을 위해 공항당국에 협조했을 뿐이라고 자위해도 찜찜한 기분은 남습니다. 한두 사람의 범죄자를 막기 위해 그렇게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차별적으로 불편을 겪게 하는 것이 너무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항공기 테러가 없는 요즘 상황에선 더 그렇지요.

물론 과거엔 달랐지요. 1960년대 이후 2001년의 9·11테러까지 세계는 항공기 테러로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항공기 테러가 갖는 엄청난 파괴력으로 인해 항공기는 테러범의 주요 목표물이었습니다. 중동과 서유럽의 테러단체 외에 일본의 적군파까지 항공기 테러에 가담했습니다.

그 정점이 9·11사건입니다. 이 전대미문의 테러로 세계는 공포에 떨었고, 공항의 검색대에는 그 공포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입니다. 9·11은 테러의 역사를 바꿨고, 보안검색의 역사도 바꿨습니다. 9·11 이전에 공항검색대의 시간당 처리인원은 350명이었으나 그 후로는 149명으로 반 이상 줄었습니다.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는 미국은 전쟁을 많이 하는 나라입니다. 미국은 9·11사태에 대한 보복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전쟁을 시작해 아프간에서는 아직도 끝을 못 냈고, 지금은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새로운 테러집단 이슬람국가(IS)와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중동 테러단체들의 테러는 미국을 주목표로 하고 있어 세계에서 미국 공항의 출입국 절차가 가장 삼엄합니다. 미국의 안전기준은 다른 모든 나라들에게도 적용돼 지구촌 공항들의 보안검색대 앞에 긴 줄을 서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1987년 북한이 저지른 대한항공기 폭파테러인 이른바 '김현희 사건'을 겪었습니다. 그에 앞서 1958년, 1969년에 여객기 납북 사건도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영종도 공항이나 김포공항에서 북으로 수 분만 날아가면 북한의 대공포가 남쪽 하늘을 겨냥하고 있는 휴전선입니다.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 보안검색의 수요가 큰 나라입니다.

그러나 9·11 이후 보안검색의 강화와 검색기술의 첨단화 덕분에 세계적으로 항공기 테러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남북한 간에도 북한에 의한 서해 해전, 연평도 포격, 천안함 폭침 등의 국지적 도발은 있었지만 김현희 사건 이후로 항공기 테러는 없었습니다.

올해에 발생한 국제적인 항공기 사고 가운데 테러 관련 사고는 우크라이나 반군에 의해 격추된 말레이시아기 사건입니다. 지상의 반군에 의해 피격된 만큼 공항 보안검색대와는 관련이 없는 사건입니다.

어떤 여객기를 대상으로 어떤 기상천외한 테러가 다시 발생할지 모르나 9·11 이후 10년 넘게 항공기 테러가 발생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국제적인 테러 통제가 잘 작동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테러범들이 항공기 테러를 아예 포기해야 할 정도로 보안에 철저를 기하는 것과 함께 승객의 불편을 최소화하는 방안도 강구돼야 하겠습니다. IATA는 ‘미래의 검색(Checkpoint of Future : CoF) 계획을 통해 승객 개인정보에 바탕한 우범자 위주의 보안검색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도 인권의 문제 등 많은 문제점이 있지만 거의 모두라고 할 수 있는 선량한 승객들을 범죄자 취급하는 현재의 검색절차는 개선돼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비행기로 여행하는 것이 버스나 기차 여행처럼 간편해지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남북한 사이에서도 전쟁이라는 ‘만약의 사태’가 결코 일어나지 않을 ‘만부당한 사태’로 바뀌어, 자원배분의 효율화를 이룰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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