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인 임종건

지난달 29일 실시된 대만의 지방선거에서 집권 국민당이 야당인 민진당과 무소속에게 대패한 것과 함께 대만의 수도 대북(臺北)시의 시장에 무소속 후보가 당선되는 이변이 연출됐습니다.

국민당은 직할시 6곳 중 5곳을 잃었고, 22개 현(縣)·시(市) 가운데는 6곳만 건졌습니다. 총리 격인 행정원장이 이미 사의를 표했고, 대통령 격인 마영구(馬英九·마잉주) 총통도 책임지겠다며 당 주석직을 내놨습니다.

대북시장 선거가 중요한 것은 현 마 총통이나 진수편(陳水扁 ·천수이편) 전 총통이 거친 자리로 총통 등용문으로 통하기 때문입니다. 가문철(柯文哲·커원저) 시장 당선자는 올해 55세인 외과의사 출신의 정치 초년생입니다. 그가 민진당의 러브콜을 사양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것은 유권자들의 기성 정당에 대한 불신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개의 나라에서 집권당은 부패와 무능, 야당은 파벌과 대책 없는 반대 때문에 유권자들부터 불신을 삽니다. 대만의 사정도 그와 비슷해서 유권자들은 국민당의 부패와 무능을 심판한 것이지 민진당이 잘해서 이긴 게 아니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국민당은 이런 국민정서를 안이하게 보고 대북시장 선거에 금권(金權)정치의 상징적인 인물인 연전(連戰 롄잔)명예주석의 아들 연승문(44 · 連勝文 · 롄성원)을 후보로 내세웠습니다. 국민당은 막판에 다급해지자 대만 사람들의 반한감정을 이용해 민진당을 공격하는 내용의 TV선거광고를 방영하는 악수까지 두었습니다.

가 당선자가 얻은 57.16%의 득표율은 40.82%를 득표한 연 후보를 예상보다 크게 압도한 것으로 그동안 무당파 성향이었던 젊은 유권자들을 투표소로 끌어낸 결과라는 분석입니다. 그의 선거운동은 인터넷과 SNS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것이었는데, 연 후보는 이를 두고 인터넷 상의 악성 유언비어를 패인으로 꼽았습니다.

가 당선자는 선거공약으로 시장 주관 주요 회의록의 일반 공개, 시청 각 부서의 예산지출 내역의 공개 등 ‘투명청렴 행정’과 ‘주민참여 행정’을 내걸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공약은 한국의 선거에서도 본받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무소속 시장으로 그가 중앙정부와 의회를 어떻게 상대할 것인지도 주목거리입니다. 그는 당선소감 일성으로 ‘민진당은 옛 친구, 국민당은 새 친구’라고 했습니다. 여야를 친구로 삼고, 양당의 협조를 얻어서 시정을 이끌겠다는 것입니다.

무소속 대북시장의 등장을 보면서 필자는 무소속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생각해봅니다. 지자체 행정에서 무당파 정치는 선진국에선 흔한 일이고, 아시아 쪽에선 일본이 좀 앞서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무당파 정치는 자민당의 일당독재, 민주당의 지리멸렬에 신물을 느낀 유권자들의 선택이었습니다만 성공적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최근의 예가 2008년 일본 지방선거에서 ‘오사카 유신회’라는 사실상 무당파 격인 지역당 후보로 오사카 부(府) 지사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당시 38세의 하시모토 도루 지사입니다. 그는 ‘파탄 난 부 재정을 흑자로 만들겠다’ ‘공무원을 줄이겠다’ ‘월급과 퇴직금을 깎겠다’는 등 행정개혁을 공약으로 표를 얻었습니다.

초기엔 공무원의 봉급과 퇴직금을 깎는 등 성과를 올렸습니다. 오사카 시와 오사카 부를 합쳐 오사카 도(都)로 만들어 인력 20%를 감축하겠다며 지사를 중도 사퇴하고 오사카 시장에 출마해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승승장구하는 듯하던 그의 정치가도는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전 도쿄도지사와 같은 극우파와 손을 잡고 일본유신회라는 전국 정당을 만들어 중앙정치 진출을 시도하면서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불구하고 자민당 보수파보다 더 수구적인 색깔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온갖 극우적인 망언들을 쏟아냈습니다. 전쟁이 있는 곳에 위안부는 있게 마련이라고 하더니, 주일 미군을 향해 ‘풍속업소(홍등가)를 많이 이용하라’는 막말을 해서 미국 방문이 거부당하는 망신을 샀습니다.

어느덧 ‘괴물 시장’처럼 돼버린 그에게 기성 정당을 대신할 참신한 정치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속은 기분일 것입니다. 시장임기를 남겨두고 오는 14일 실시되는 총선 출마의사를 밝혀 또다시 의회진출이라는 변신을 시도하는 그의 행보가 불안해 보입니다.

한국에서도 안철수 의원이 서울시장 후보로,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던 때 기성 정당에 실망감을 갖고 있던 유권자들은 비슷한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당시 안철수 씨는 하시모토나 가문철 같은 결단력이 없었습니다.

그는 서울시장 자리를 박원순 후보에게 넘겨줬고, 대선 경선에서도 중도 포기했습니다. 실천해서 성공을 했더라도 현재의 모습처럼 기성 정당에 얹히는 신세가 됐을 것입니다. 무소속으로 당선된 박원순 시장도 여론 지지도 10%대의 민주당에 얹히는 신세가 됐듯이 말입니다. 이는 새로운 정치를 갈망하는 무당파 유권자들의 기대를 저버린 것입니다.

행정개혁을 내세운 대만의 가 당선자도 출발만큼은 하시모토 시장이나 박원순 시장을 닮았습니다. 그가 한국이나 일본에서 성공적이라고 하기 어려운 무소속의 가치를 십분 살려서 무능한 기성 정당들에게 대안적인 정치를 보여주고 경각심도 일깨우는 시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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