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인 김영환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니 돌인들 무거울까.
늙기도 설워라커든 짐을조차 지실까?‘

지하철 풍경을 보면 학교에서 배운 정철의 시조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60대 이상의 노인 취업률이 20대 취업률보다 더 높다는 요즘 지하철 속에서 어디 알바라도 하러 가시는 건지 20리터 정도의 빨간색 배낭을 짊어진 노부인들을 자주 보기 때문입니다. 칠순대로 보이는 노부인들이 배낭을 메고 차 안으로 줄줄이 들어서는 모습을 보면 배낭 안에 무엇이 담겨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옷차림을 보면 등산화가 아니라서 가방보다 편한 배낭에 물과 도시락이라도 담아 일터로 가는 모양입니다.

실제로 내가 아는 강화도의 일흔이 다 된 부인은 몇 년 전에 남편을 여의고 혼자 살고 있지만 일요일 밤이면 중형 배낭을 멘 채 시외버스를 타고 3시간도 더 걸리는 서울의 동쪽 끝으로 맞벌이하는 젊은 부부의 두 아기를 봐주러 떠났다가 금요일 밤에 돌아옵니다. 힘들게 돈을 버는 이유는 대학 다니는 손녀에게 용돈을 충분히 주기 위해서랍니다.

배낭은 이제 남녀노소의 필수품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지하철의 배낭에 대해 얼마 전에도 이 칼럼에서 쓴 적이 있지만 지하철에 타기 위해 거꾸로 뒤돌아서서 배낭부터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배낭이 타인의 살에 닿건 말건 상관할 바 아니라는 것이죠. 인신의 자유룰 존중하여 어린이건 성인이건 남이 내 몸을 만지거나 스치는 행위를 혐오하는 문화가 아니더라도 이는 남의 인신에 너무나 둔감한 악행입니다.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가장 혐오하는 것이 남의 몸을 스치고도 아무 미안한 기색이 없는 것이라고 하니 이런 점에서도 잘난체하는 한국인들이 선진국의 표준에 맞추려면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며칠 전 대형 마트의 아주 폭이 넓은 식당가 통로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뭘 먹을까 하고 모형 음식을 전시하는 유리 진열장 안을 보고 있는데 정신없이 수다를 떨고 가던 부인이 팔꿈치로 내 팔뚝을 강하게 부딪쳤습니다. 안 들리도록 조그맣게 욕을 했더니 아내가 “그러면 좀 낫소?”라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다 그러구 사는 거야”라고 참으라면 할 말이 없긴 합니다. 

배낭이 급증한 것은 젊은이들이 선도한 유행도 유행이지만 지하철에 선반이 많이 사라진 것도 원인의 하나라고 봅니다. 선반을 없앤 것은 테러용 물건을 두고 내리지 못해 테러 방지에 도움이 되고 나처럼 정신 없는 사람이 가방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 훌륭한 방법이긴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서 있을 비좁은 객차 공간이 짐과 함께 인간이 서 있어야 하는 복합 컨테이너로 격하한 느낌이 듭니다. 어느 날 사방을 둘러보면 이리 틀어도 배낭, 저리 틀어도 배낭, 배낭에 치입니다. 

과거 지하철이 없던 시절 콩나물시루 같은 만원버스가 사람들을 한 곳에 몰려 서 있지 못하도록 한 번은 왼쪽, 또 한 번은 반대쪽으로 차체를 비틀던 시절에 사람들은 서 있는 사람들의 가방이나 물건 보따리를 받아주는 것을 공중도덕으로 알았습니다. 무거운 책들을 가방에 들고 다니려면 정말 무거워서 팔이 빠질 지경이었으니까요. 그런 풍습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아 지금도 만원 지하철이나 시내버스에서 아주 드물게 젊은이들의 물건을 받아 무릎에 올려놓는 고마운 노부인들의 모습을 보긴 봅니다.

공항철도에는 아예 짐을 올려놓는 선반이 없습니다. 가방을 모아놓는 곳은 있지만 태부족이라서 여행객들은 초대형 가방을 자기 발치에 놓고 있는데 승객들은 통로 중간을 따라 걷다 보면 희한하게 바로 머리 위에 달려 있는 손잡이에 머리를 부딪치기 십상입니다. 이 칸에서 저 칸으로 이동할 때의 그 기분 나쁨이란…. 그래서 이래저래 충격 방지용으로 재질이 아주 두꺼운 펠트 모자라도 쓰려고 고르다 고르다 찾지 못해서 차선책으로 감이 조금은 빳빳한 모자를 노점에서 샀는데 자동차 트렁크 문을 닫을 때 부딪혔더니 효과는 전혀 없이 지독하게 아팠습니다.

9호선은 경로석에만 짐을 놓는 선반이 있습니다. 결국 발전인지 퇴보인지 모를 지하철 속의 이런 변화가 사람들을 더욱 배낭을 많이 지도록 하며 남에게 피해를 주고도 태연하도록 비인간화 하는 요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지하철은 인원을 수송하는 것이지 짐을 운반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별 수 없지만 개선할 방법은 찾아야죠. 일본에서 들여온 서로 길게 마주보는 이열 횡대의 좌석 배치도 아울러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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