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인 임종건

‘너무 값싸게 주어지고 무비판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충성심은 양심의 부패와 원칙의 배반을 가져오는 비옥한 토양 또는 면죄부가 된다.’

미국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찰스 블로가 ‘양극화 정치의 위험성’이란 제목의 칼럼에서 한 말입니다. 그는 미국 정치에서 이념의 분화현상이 선악 또는 생사의 문제와 같은 종교적 차원으로 치닫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전통적으로 미국의 양당제는 보수적인 공화당과 진보적인 민주당 간의 대결이었으나 유권자의 표를 의식해 상대당의 좋은 정책들을 베끼기 하면서 상당히 유사해졌다는 평가가 있었습니다. 낙태, 동성애, 큰 정부, 작은 정부 정도를 놓고 양당의 차이를 말하지만 정당 차원이라기보다는 정치인 개인의 선택의 문제로 인식됩니다.

그러던 양당 간의 간극이 지난 20년 사이에 점차 벌어져서 상대 정당에 대한 무관심이 깊어지고 광범해졌다는 것입니다. 일관되게 보수 또는 진보라고 말하는 사람이 20년 전의 10%에서 지금은 21%로 배 이상 늘어 지지 정당에 줄서는 풍조가 심화됐다는 겁니다.

이념적 중첩현상도 사라져 공화당원 92%가 중도 민주당원보다 우편향이고, 민주당원 94%는 중도 공화당원보다 좌편향으로 나타났으며, 민주당원 27%가 공화당이 국민의 안락을 위협한다고 보는 반면 공화당원 36%도 민주당을 그런 시각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수주의자는 정치적 견해가 같은 곳에서 살고 싶고, 친척이 민주당원과 결혼하는 것도 싫다는 반응을 보였고, 민주당원도 조금 낮지만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블로는 이같은 이념의 편가르기 현상이 이념 지향의 케이블 TV와 인터넷 등장 이후 더 심화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매체들을 ‘어중이떠중이를 동원해서 시청자를 화나게 하고, 적을 악마화하는 능력으로 밥벌이를 하는 선동꾼’이라고 규정한 뒤, 이들 매체는 시청자들에게 이분법의 이데올로기를 강요하고, 시청자의 평형감각을 변절의 증거로 매도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미국에 비할 때 한국 정치의 편향성은 훨씬 더 심각합니다. 편향성의 뿌리가 이념도 아니고 맹목적인 지역주의라는 점에서 더욱 악성입니다.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표만 된다면 포퓰리즘 경쟁을 일삼아 정책차이도 별로 없습니다. 여당이었을 때 추진하던 정책을 야당이 되면 반대하니 일관성도 없습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일삼다 보니 사사건건 대결입니다.

각종 선거에서 나타나는 대구경북(TK)과 광주전남(KC)의 80~90%에 이르는 몰표현상은 상대지역에 대한 거부감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대 지역에 대한 거주희망이나 상대 지역 사람과의 결혼 의사를 묻는다면 반대의사가 투표율과 비슷할지도 모릅니다.

여야 간에 평화적 정권교체를 경험했음에도 그런 편향성이 완화될 여지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악화하고 있습니다. 케이블 TV와 인터넷이 정치적 편가르기의 도구로 전락했다는 블로의 지적은 오히려 한국 상황을 두고 한 말 같습니다.

대구와 광주지역의 국회의원들이 평시에 상대지역을 교차 방문하여 친선 행사를 갖습니다. 의원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의 시민단체들 사이에서도 두 지역 간 친선과 화합의 행사를 엽니다. 그러나 지난 30년 가까이 선거 때만 되면 편가르기 고질은 여지없이 도졌습니다.

지난해 7·30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의미 있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새누리당의 이정현 의원이 전남 곡성·순천 지역구에서 당선돼 지역정치를 깨는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그보다 앞서 민주당 출신의 김부겸 전 의원이 대구에서 국회의원과 대구시장에 출마해 당선에 비견될 40%대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런 투표 양태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는 후보자 개인의 인기와 지지했던 정당에 대한 불신이 낳은 결과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에 두 지역 주민들의 평형감각 회복의 측면도 있다고 봅니다. 그 평형감각은 두 지역에서 점차 넓혀질지언정 결코 변절이나 배신으로 매도되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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