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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건 칼럼>국가(國歌) 같은, 국가 아닌, 애국가
2015년 09월 14일 (월) 09:38:43 임종건 webmaster@smedaily.co.kr
   
▲ 언론인 임종건

올해는 광복 70주년이자 애국가가 작곡된 지 80년,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 선생의 서거 50주년 되는 해입니다. 그런 뜻깊은 해를 기념하여 지난 8월 2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2015 한국환상곡’ 이란 제목의 애국가 기념음악회가 열렸습니다.

안익태 기념재단과 일요신문이 공동 주최한 이 음악회는 애국가로 시작되었습니다. 객석을 가득 메운 청중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일제히 일어나 수원시립교향악단의 연주에 맞춰 국립합창단, 재단이 모집한 국민참여합창단, 숭실콘서트콰이어와 함께 애국가를 4절까지 열창했습니다.

애국가는 이날 콘서트의 피날레를 장식한 안익태의 대표작인 교향곡 ‘한국환상곡’의 종반부에서 다시 한 번 장엄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이 교향곡에는 한국의 모든 소리가 담겨 있는 듯했습니다. 시냇물 소리, 바람 소리, 절간의 풍경소리, 흥겨운 농악소리, 해방의 감격, 전쟁의 고통과 신음, 건국의 고동소리 등이 모두 수렴된 듯했습니다.

음악회 후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귓가에선 애국가 선율이 맴돌았으나 머릿속은 무겁기만 했습니다. 애국가가 광복 70주년이 되도록 공식 국가(國歌)로 제정되지 못한 사실, 그것이 작사자를 특정할 수 없다는 점 외에, 작사자와 작곡자의 친일 논쟁에서 연유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작사자가 누구냐에 관해서는 윤치호(1865~1945), 안창호(1878~1938), 민영환, 최병선 등 여러 사람 중에서 앞의 두 사람이 그중 많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윤치호 작사설은 작사자로 이름이 적혀 있는 악보가 존재하는 등 증거의 확실성에서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노년의 친일 행각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가사에 담긴 애국적 의미조차 의심을 받는 지경입니다. 그는 일제 말에 일본 귀족원의 의원까지 지내 2009년에 발표된 친일반민족행위자 705명의 한 사람으로 이름이 올라있습니다.

그에 비해 안창호 작사설은 추론적인 요소가 있어보이지만 그가 초지일관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라는 사실로 인해 그의 애국가 작사는 당위로 평가받고 있는 듯합니다.

작곡자가 안익태(1906~1965)인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에게도 친일의 딱지가 따라붙습니다. 1942년 그가 일제의 괴뢰국가인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기념식 때 ‘만주환상곡’을 작곡해 지휘한 이유로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 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랐고, 최근엔 1936년 무렵 루마니아에서 열린 일본 명치절 행사에서 일본 국가 ‘기미가요’를 연주했다는 안익태의 일본인 후원자가 썼다는 기록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안익태와 관련한 두 사건은 모두 1930년대 후반 일본인 후원자와의 교유가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음악적 재능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것으로 볼 여지도 있어 친일로 매도할 일만은 아닌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애국가를 작곡한 1935년까지 안익태는 망국의 설움을 안고 세계를 떠돌던 음악가였으며, 국가를 작곡하겠다는 일념에서 세계 각국의 국가를 연구하던 중 신의 계시처럼 떠오른 악상을 옮긴 것이 애국가였다고 생전에 회고했습니다.

최소한 애국가 작곡 이전, 그의 행적에서 친일이나, 음악세계에 왜색의 혐의는 없습니다. 그런 점이 감안돼 2009년 반민족행위자 명단에서 안익태의 이름은 빠졌습니다. 애국가를 국가로 지정한다고 할 때 작곡자와 관련된 결격시비는 덜어진 셈입니다.

남은 것은 윤치호의 친일 부분입니다. 그가 애국가를 작사한 시기는 1907년으로 한일합병 전입니다. 그 시절 그는 독립협회 회장으로, 대한자강회 회장으로 나라의 독립을 꿈꾸던 개화파 지식인이었습니다.

나라가 일본에 병탄된 뒤인 1911년에도 초대 총독 데라우치 암살이라는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돼 투옥됐습니다. 4년 뒤 일제에 전향을 서약하고 석방된 뒤부터 그는 극단적 친일 행각을 벌였습니다.

친일의 문제는 해당 인사의 전생애적인 평가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가 친일 이전에 독립투사였더라도 그것은 친일을 위한 위장행동으로 간주돼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적어도 애국가 가사에 윤치호의 애국충정이 담겨 있음을 부인할 순 없을 것입니다. 그가 반민족행위자로 낙인찍혔다고 해서 그런 순수성조차 부인되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윤치호가 친일했기 때문에 국가(애국가) 작사자의 지위를 인정할 수 없다면 애국가는 영원히 국가가 될 수 없습니다. 그의 친일은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애국가를 폐하고 국가를 새로 지으면 문제가 해결될까요? 그것은 해결책도 아니고, 애국가를 그 누구의 작사 작곡이 아니라 나의 노래라고 생각하는 절대다수 국민들이 원치 않는 일입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애국가와 함께한 세월입니다. 영광의 순간, 고난의 순간에 우리는 애국가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윤치호 안창호 안익태의 애국가를 뛰어 넘어 5천만의 애국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1982년 국가제정추진위가 발족돼 애국가의 가사가 감상적, 의타적(하느님이 보우하사), 소모적(마르고 닳도록), 반도사관적(무궁화 삼천리)이라는  등의 지극히 주관적인 이유로 국가를 새로 제정하려 했으나 무산된 것도 국민들이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1948년 인민군 창설 때까지 애국가를 불렀던 북한이 새로 국가를 만들었지만 그들은 새로 만든 국가 대신 ‘김일성장군의 노래’라는 우상화 노래를 국가로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남북통일이 된다면 북녘 땅에서도 다시 애국가가 울려 퍼져야 한다고 봅니다.

애국가의 작사자가 많은 것이 국가 지정에서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1955년 국사편찬위가 결론을 냈듯이 작사자를 '미상’으로 남겨놓고 작곡자만 특정해 국가로 지정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세계에는 일본이나 영국처럼 작사자가 미상인 국가도 많습니다.

애국가도 안익태가 작곡하기 전에는 찬송가나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자인’ 같은 곡에 실려, 다양한 버전의 가사로 불렸습니다. 작사자 미상은 사실관계에서도 타당성을 지닐 수가 있습니다.

조국도 없이 남의 땅에서 서럽게 태어난 애국가입니다. 애국가를 둘러싼 친일 문제도 어찌보면 식민지 시대의 상처입니다. 조국을 잃었을 때 망국의 한을 달래주었고, 광복 후엔 조국의 영광과 시련을 함께해온 애국가입니다. 이제는 ‘국가가 아닌 국가 같은 애국가’를 공식 국가로 지정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그것이 애국가를 자주적으로 친일의 굴레에서 해방시키는 길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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