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약계층 200만명 경제활동인구 8%에 달해⋯재기 기회 주는 것이 훨씬 이익

금융당국은 국민행복기금과 금융공공기관이 보유한 소멸시효 완성 채권 약 21조원을 8월말까지 소각한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123만명의 채무자들이 추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연말까지 자율 소각키로 한 민간 영역까지 포함하면 24조원의 채권이 없어지면서 214만명이 혜택을 보게 된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국민행복기금 및 금융공공기관이 보유한 소멸시효완성채권의 소각을 통해 상환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장기간 추심에 시달리는 취약한 계층의 재기를 돕는 한편 이번 조치가 일회성 이벤트에 그치지 않고 제도화, 법제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번 조치는 이전의 농어촌부채탕감이나 국민행복기금 시행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전의 정책이 취약 계층에 대한 이자나 원금의 일부를 탕감해주고 나머지를 장기 저리로 갚아 나가는 것이 골자였다면, 이번 조치는 금융소외계층의 금융 접근성을 제고하고, 금융취약계층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는 ‘포용적 금융’이 핵심이다.

그동안 금융기관들은 법적인 소멸 시효인 5년이 지나도 법원의 지급명령 등을 통해 시효를 10년 단위로 연장하면서 연체 발생 후 15년 또는 25년까지 보유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불법·편법적 추심이나 무분별한 시효 연장 조치로 피해를 입는 사례가 지속적으로 발생했기 때문에 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소각’이라는 특단의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서는 이번 조치에 대해 ‘형평성 문제’와 ‘도덕적 해이’를 들면서 부작용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도 주장한다. 한 신문은 사설에서 “정부 주도로 채무를 탕감할 경우 성실하게 빚을 갚고 있는 기존 채무자들이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을 수 있고, 정치권 주도로 각종 선거 때마다 채무조정, 탕감 조치들이 반복될 경우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는 이번 조치의 의미를 잘못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채무를 탕감을 경우 ‘도덕적 해이’가 발생한다는 것인데, 이번에 구제되는 약 200만명 중에서 문제가 되는 채무자는 소수이고, 대부분은 몰락한 소상공인이나 청년실업자 등 벼랑 끝에 서있는 사람들이다. 이들 200만명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기회를 얻는 것이 일부에서 제기하는 ‘도덕적 해이’에 대한 우려보다는 도덕적으로 더 명분이 있다. 더욱이 상환의무가 없는 채권을 소각하는 것으로 도덕적 해이와 크게 관련도 없다.

다음으로 이번 조치가 선례가 되어 앞으로 각종 선거 때마다 악용될 것이라는 지적도 합당치 않다. 이번 조치는 상환 의무가 없는 채권을 소각할 뿐만 아니라 향후 불법·편법적 추심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제 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선거 때마다 ‘부채 탕감’ 구호가 되풀이될 여지가 없다. 일부 불순한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를 빌미로 경제활동인구의 약 8%에 달하는 200만명의 취약한 계층이 재기하는데 딴지를 거는 사람들의 도덕적 기준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옛말이 있지만, 구할 수 있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나라님의 의무이다.

이원호 논설위원·경제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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