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초기 재벌 손보다가도 경제 어려워지면 ‘SOS'
삼성 대규모 투자 발표했지만 정부에 다양한 민원
시간이 걸리더라도 ‘공정 경제’로 성장 추구해야

평소 잘 알고 있는 단어지만, 사전적인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자 두 개의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첫 번째 단어는 정경유착(政經癒着). 사전에는 ‘기업은 정치인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정치인은 반대급부로 기업인에게 특혜를 베푸는 정치인과 기업인 사이의 밀착 관계’로 나와 있다. 두 번째 단어는 공식(公式)이다. 사전에는 ▲국가적이나 사회적으로 인정된 공적인 방식 ▲<수학>계산의 법칙 따위를 문자와 기호로 나타낸 식 ▲틀에 박힌 형식이나 방식 등 3가지로 뜻을 풀이하고 있다.

정권이 바뀔 때 마다 초기에는 부정부패 척결과 시장경제 확립 등의 명분으로 대기업(재벌) 손보기가 관행처럼 진행되었다. 하지만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경제 활성화’라는 이름으로 흐지부지 되고, 정권 말에는 정경유착으로 귀결되는 ‘공식’의 세 번째 사전적 풀이인 ‘틀에 박힌 형식이나 방식’과 같은 일이 반복되어 왔다.

1993년 문민정부(김영삼) 초기 현대그룹은 비자금 조성 등으로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재판에 회부되어 곤욕을 치렀다. 국민의 정부(김대중)와 참여정부(노무현)의 민주당 정권하에서는 재벌이 청산의 대상으로까지 지목되었으나, 재벌은 청산되지 않았고 정권 말에는 더욱 더 기세등등했다.

기업 친화적 정책을 표방한 이명박 정부를 지나 박근혜 정부 초기에는 다시 긴장 관계가 형성되었다. ‘지하경제 양성화’를 지향한 박근혜 정부는 재벌 기업의 탈세와 총수 일가의 비자금 조성과 관련한 수사를 초기부터 강하게 추진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에서 보듯 사상 최악의 정경유착으로 대통령이 임기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야말로 정경유착의 종합선물 세트와 같은 추악한 면을 보여주었다.

이쯤 되면 재벌들은 정권 초기의 기업 길들이기에 내성이 생겼을 것으로 보인다. 기업은 으레껏 ‘통과 의례’ 정도로 생각하고 엎드려 있으면 된다. 경제 지표가 나빠지고 고용이 불안해 정권의 지지율이 하락하기 시작하면 정부(혹은 권력)가 기업에 손 벌리러 온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때 기업은 선심 쓰듯 투자를 발표하고 고용을 늘리겠다는 약속을 하면 권력과 기업의 밀월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터득했을 가능성이 높다. 수학 공식처럼 ‘정권을 대입’하면 똑 같은 일이 반복되어 왔다. 

촛불 민심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여러모로 지난 정부와는 다르게 출발하였다. 경제정책에 있어서도 기존의 대기업 중심의 성장모델에서 과감하게 탈피하여 중소벤처기업 중심의 혁신 성장과 소득주도 성장을 추진하여 이전 정부와 차별성을 가졌다. 더욱이 그동안 정부와 재계의 창구 역할을 담당해온 전경련을 그림자 단체로 전락시키면서까지 대기업(재벌)과 일정하게 거리를 두는 행보를 해나갔다.

대통령과 여당 지지율을 고공행진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정부가 기업과 타협하지 않고 소신껏 정책을 추진해 나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약 1년이 지난 지금 앞서 언급한 ‘정경유착의 공식’이 이번에도 적용될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일자리 문제에서 발목이 잡혔다. 지난 6월까지 취업자 증가폭은 5개월 연속 10만 명 전후에 머무는 '일자리 쇼크'가 이어져,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가장 좋지 않은 흐름을 보이고 있다.  더욱이 7월에도 고용상황이 급격히 개선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결국 경제 문제로 대통령과 여당인 민주당의 지지율이 급락하자 정부는 재계의 대표 격인 삼성전자와 접촉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6일 김동연 부총리가 삼성전자를 방문하고, 삼성전자는 이틀 후 150조원의 대규모 투자와 70만 명 규모의 직간접인 고용을 발표했다. 우리 경제가 어려워질 때마다 역대 정부에서 대통령이 재벌 총수들을 불러 대규모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부탁하고, 총수들은 이에 투자와 고용으로 화답하던 모습과 유사하다. 오히려 김 부총리가 기업을 직접 방문해 기업의 애로를 듣고, 기업은 투자와 고용을 발표하는 그림은 이전보다 더 적극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 자리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바이오시밀러(복제약)의 가격결정권을 기업에게 달라고 김동연 부총리에게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이 부회장은 바이오산업 육성을 위한 R&D(연구개발)비용 세액공제, 바이오의약품 원료물질 수입·통관 절차 개선 등의 민원도 넣었다. 대통령이나 부총리가 부탁한다고 기업이 예정에 없던 투자를 계획하고 고용을 늘리지 않는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결국 대기업이 먹고 있는 밥상에 정부가 숟가락을 하나 더 얹어 주는 대가로 기업은 뒤로 실리를 챙기는 정경유착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정치와 경제는 상호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지만, 탐욕에 사로 잡혀 서로 이용하려 든다면 추악한 정경유착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문재인 정부는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촛불 민심을 통해 탄생한 정권이다. 대기업 등 기득권 세력과 타협하지 않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공정 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올바른 ‘혁신성장’을 추구해 나가기를 바란다. 이제는 틀에 박힌 형식이나 방식인 ‘나쁜 공식’에서 탈피하자.

이원호 논설위원·경제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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