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더 타임스’의 뉴욕 특파원을 지낸 피터 왓슨은 ‘컨버전스’라는 책에서 오늘날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현대 과학의 거대한 힘은 150여 년 전에 일어난 ‘컨버전스’에서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영어 ‘컨버전스(convergence)’의 사전적 의미는 ‘한 점으로 모인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하나로 합친다’ 또는 ‘경계가 무너지면서 사실상 하나가 된다’는 포괄적 의미를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여러 가지가 통일이나 단일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 혹은 여러 기술이나 성능이 하나로 융합되거나 합쳐지는 일로, 보통 ‘수렴’으로 번역된다. 요즘엔 휴대전화에 카메라 MP3 DMB 등의 기능이 덧붙여지는 ‘디지털 컨버전스’와 같이 이종 제품 비즈니스모델 산업 간 ‘결합’ 또는 ‘융합’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피터 왓슨은 ‘컨버전스’의 무수한 사례를 설명한다. 먼저 1840~50년대에 발표된 ‘에너지보존법칙’이 최초의 ‘컨버전스’로 평가된다고 했다. 의사 출신 독일의 율리우스 마이어는 인도네시아 여행에서 날씨가 험하면 바닷물의 온도가 높아지고, 열대에 사는 사람의 피가 더 붉다는 경험을 얻었다. 그는 이런 경험을 통해 1842년 ‘무생물계의 힘들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운동과 열은 서로 변환 및 전환될 수 있는 동일한 힘의 서로 다른 표현일 뿐이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에너지가 다른 에너지로 전환될 때, 전환 전후의 에너지 총합은 항상 일정하게 보존된다’는 ‘에너지보존법칙’을 정립한 사람은 독일의 헬름홀츠다. 그는 1847년 ‘힘의 보존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에너지보존법칙을 수학적으로 표현, 물리학 전반에 적용된다는 것을 명백히 했다. 이 이론은 열 광학 전기 자기 음식과 혈액의 화학작용 등에 관한 각 분야의 지식들이 서로 연결되고 조화를 이룬 과정을 통해 완성됐다. 학문들 간의 통섭과 융합, 특히 수학과 물리학의 ‘컨버전스’로 탄생한 것이다.

1922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덴마크 물리학자 닐스 보어의 물리학과 화학의 통일, 천문학 기후학 식물학 고고학을 연계해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는 앤드루 엘리커트 더글러스의 ‘나이테연대학(dendrochronology)’, 영국의 존 볼비의 소아과학과 동물행동학을 통합,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질량과 에너지, 공간과 시간의 통합 등이 ‘컨버전스’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그리고 왓슨은 이렇게 설명했다. “양자화학과 분자생물학에서도 그런 연계가 이루어졌다. 입자물리학은 천문학과 손을 잡고 우주 진화의 초기 역사를 밝혀냈다. 소아과학은 동물행동학의 통찰에서 큰 도움을 받았으며, 심리학은 물리학과 화학은 물론이고 경제학과도 손을 잡았다. 유전학은 언어학과 조화를 모색하고 있고, 식물학은 고고학과, 기후학은 신화와 손을 잡았다.”

현대 과학은 이후 학문들 간의 공고했던 경계를 허물었다. 서로 교류하고 조화를 모색해나가는 지적 방법론을 활발히 이어나갔다. 탄탄하게 구축한 통섭과 융합의 경험을 바탕으로 철학 윤리 역사 문화, 나아가 정치에까지 침투했다. 그렇다. 정치도 ‘컨버전스’라는 현대 과학의 ‘거대 서사(master narrative)’를 결코 외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컨버전스 정치(convergence politics)’, 즉 ‘융합정치’가 현대 정치의 새로운 솔루션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과연 오늘날 한국 정치에서 ‘컨버전스 정치’의 가능성은 없는가.

지난 25일 더불어민주당 제3차 정기전국대의원대회에서 새 대표로 선출된 이해찬 대표는 수락연설에서 야당과의 협치와 관련, “5당 대표회담을 조속히 개최하면 좋겠다”며 “국민들을 위한 최고 수준의 협치를 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기자간담회에서 이 대표는 ‘최고 수준의 협치’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청와대에서도 고민이다. 당으로서도 고민하고 있다. 사안에 따라서 서로 간의 논의를 통해 합의 할 수 있는 사안도 있고, 상대적으로 도저히 안 될 것도 있고 그렇다. 민생 관련 상설 협의체에서 8월 입법해서 예산까지 뒷받침 하자는 합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이행하겠다. 근본적 의견 대립은 충분히 논의해해서 상대방 입장 파악하고 우리 입장 이해시키는 노력이 협치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 된다. 여러 가지 인적 상호간의 배치도 있을 수 있다. 당사자와 청와대가 함께 해야 할 사안이라 생각한다.” ‘여야 민생협의체’, ‘인적 상호배치’가 주된 내용이다. 그 중에서도 ‘인적 상호배치’가 핵심키워드다.

‘인적 상호배치’는 무엇을 말하는가. ‘연정(聯政)’을 가리킨다. 야당 인사들을 장관 등으로 발탁하겠다는 ‘연합정치(coalition politics)’를 의미한다. 이 대표가 완전히 드러내지 않았지만 권력을 공유할 수 있다는 ‘연합정치’ 카드를 슬쩍 내비친 것이다. 그러면서도 당사자와 청와대가 함께 논의하고 합의할 사안이라며 자신은 한 발을 뺏다. 이 대표의 이런 발언은 지난 7월23일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후속 개각과 관련, “적절한 자리에 적절한 인물이 있다면 ‘협치 내각’을 구성할 의사가 있다”고 밝힌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즉, ‘최고 수준의 협치’는 ‘협치 내각’의 구성에 있다는 얘기다.

현재 여권은 어떤 형태로든지 ‘최고 수준의 협치’를 구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협치 내각’을 통해 돌파구를 찾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판문점 선언’의 국회 인준을 위해서도 ‘최고 수준의 협치’, 즉 연합정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독일통일이 독일 연합정치의 산물이었듯이, 남북교류협력도 연합정치를 통해서 가능할 것이란 계산이 작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협치 내각’을 어떻게 구성하겠다는 것인가. 현재 국회 의석수는 민주당 129석, 자유한국당 112석, 바른미래당 30석, 민주평화당 14석, 정의당 5석, 민중당 1석, 대한애국당 1석, 무소속 7석으로 이뤄져 있다. 친여 성향은 민주당 129석, 민평당14석, 정의당 5석을 합한 148석이다. 과반수에서 1석이 부족하지만 문희상 국회의장을 포함하면 과반수인 149석이 된다.

하지만 149석으로는 어림없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이 결사적으로 저지하면 국회에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개혁입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려면 최소한 180석이 필요하다. ‘국회선진화법’에 따르면, 개혁적인 법안을 처리할 때 재적 의원의 5분의 3 이상(180석) 의원이 찬성하지 않으면 그 법안을 안정적으로 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최소한 바른미래당과의 ‘협치’를 추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여권이 한국당을 제외한 모든 야당과의 ‘협치 내각’을 구성해야 문재인 정부가 그나마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대표의 ‘최고 수준의 협치’는 바로 이 대목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협치 내각’, 즉 연합정치가 성공하기 위해선 ‘가치공유’, ‘권력공유’, ‘정책공유’라는 3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독일의 경우 2차 세계대전 종전이후 지금까지 아데나워, 에르하르트, 키징거, 브란트, 슈미트, 콜, 슈뢰더, 메르켈 총리에 이르기까지 23번이나 연합정부를 구성한 경험이 있다. 3대 조건을 놓고 마라톤협상을 통해 연정을 성사시킨 연합정치의 선진국이다.

반면 우리는 ‘DJP연합’을 3년 정도 경험한 바 있다. 연합정치의 경험이 일천하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선 ‘협치 내각’은 모래성과 같다. 언제든지 붕괴될 수 있다. ‘DJP연합’은 16대 총선이후 ‘새천년민주당+자민련+민주국민당 3당 연합’으로 원내 과반수를 차지해 간신히 버티었다. 그러나 가치와 정책공유에 실패했고, 한나라당이 133석으로 개헌 저지선을 확보해 내각제 개헌을 사실상 무산시킴으로써 ‘DJP연합’은 붕괴됐던 것이다. 그리고 2005년 6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대연정(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연합정부 구성안)을 제안했으나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한국에선 ‘협치 내각’, ‘대연정’은 쉽지 않다. 3대 조건을 충족시키기 어렵다. 게다가 다당제-연합정치는 내각제와 친화성을 갖고 있다. 현재의 승자독식 대통령제와는 친화성이 없다. 개헌이 없는 ‘협치 내각’은 뜬 구름 잡는 것이나 다름없다. 현 5당 체제와 ‘5년 단임 대통령제’ 아래서 ‘협치 내각’을 구성한다고 해도 한국당이 존재하는 한 오히려 행정부와 입법부의 교착상태를 심화시켜 국정이 마비될 뿐이다. 이것이 문재인 정부가 근본적으로 갖고 있는 한계다. 개헌 시도도 이 때문이다.

해법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한국당과의 ‘대연정’을 추진하는 것이다. ‘129석+112석=241석’이면 국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3당합당’보다 파괴력이 있다. 이를 위해선 총리를 포함해 적어도 장관직 절반을 한국당에게 줘야 한다. 과연 이게 가능한 일인가. 가치 권력 정책공유를 위해선 고도의 정치력과 결단이 필요하다.

또 하나는 ‘컨버전스 정치’다. 이념과 정책의 비빔밥을 만드는 ‘융합정치’다. 대한민국의 번영과 남북통일을 위해 대통합-대탕평-대화합의 정치를 구현하는 ‘수렴정치’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주요 정치철학자들이 ‘혼합정체’를 최고의 정치체제로 강조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에 부합하는 ‘스마트 정치’이기도 하다.

역사는 흐르고 시대는 변한다. 자고 일어나면 과학계에선 컨버전스가 일어난다. 경계가 없다. 벽이 없어지고 있다. 인공지능과 블록체인은 그 과정에 있을 뿐이다. 기술과 콘텐츠의 ‘컨버전스’가 뉴스 미디어를 확 바꾸고 있다. 문화예술의 뿌리마저 흔들고 있다. ‘컨버전스’가 시시각각으로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다. 오직 정치만 뒷걸음 치고 있다. 이제 정치에서도 이념과 정책이 잘 버무려진 ‘컨버전스’가 일어나야 한다. 
 이 대표는 지난 8월4일 광주에서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는 대표 당선요인 중 하나다. 사심(私心)없이 정치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이 대표의 ‘최고 수준의 협치’는 ‘협치 내각’만이 아니다. ‘컨버전스 정치’다. ‘융복합 정치’, ‘컨버전스 정치’로 ‘최고 수준의 협치’를 실현해야 ‘나라다운 나라’를 세울 수 있다.

조한규 중소기업신문회장‧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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