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치유재단 해산, 전범 기업 손해배상 판결 등 현안
미래지향적 관계 맺을 수 있도록 특사 등 파견해야

문재인 대통령의 연내 일본 방문은 이뤄지지 않을 것 같다. 이에 따라 한일관계는 당분간 냉각기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 국회의원들의 독도 방문, 화해치유재단 해산, 한국 대법원이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손해배상을 명령하는 판결을 내린 것에 대해 일본 정부의 반발이 쉽게 수그러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다. 결코 다루기 쉽지 않은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오랜 역사를 두고 양국은 갈등과 반목을 지속해왔다. 깊게 들여다보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열등의식 발로 때문이다. 일제 강점도 그 열등의식의 산물인 셈이다. 일제가 아예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송두리 채 없애려고 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오래 전부터 한국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일본은 야만(野蠻)을 벗어나지 못했을 터. 조선 통신사들이 일본 열도를 지나갈 때, 관중들의 환호와 열기는 최근 일본을 달구고 있는 BTS(방탄소년단)에 대한 팬덤 현상을 능가할 정도였다. 통신사들의 화려한 의상을 서로 만져보려고 몸싸움을 벌이고 했다고 하니, 그 뜨거운 열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열등의식이 내재화되면 승부욕으로 바뀐다. 그리고 승부욕이 지나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일본의 야만적인 기습과 점령, 온갖 계략과 술수로 점철된 수탈과 야수적 병탄-강점이 우리의 역사를 어지럽혔다. 일제의 조선강점과 한반도 분단이 그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1905년 12월 초대 조선통감에 취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조선 병탄의 합리화를 전 세계에 널리 홍보하기 위해 미국의 저명한 작가이자 탐험가인 조지 케넌(George Kennan)을 초청했다. 케넌은 러일전쟁 중 친일반러의 글을 ‘아웃룩(Outlook)’이라는 미국신문에 기고했던 친일인사였고, ‘아웃룩’은 당시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이 유일하게 구독한 신문이었다. 그래서 이토는 케넌을 초청했다.

일본은 미국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한 언론플레이에 케넌을 활용하기 위한 야비한 계략을 폈던 것이다. 이토는 케넌에게 “조선인들은 게으르고 더러우며 스스로 통치할 능력이 없다”며 조선 병탄의 정당화를 세뇌했다고 한다. 그 후 케넌은 두 달 동안 일본의 조선 병탄 시도를 정당화하는 기사를 송고했다. 1910년 일제의 조선 병탄에 대해 미국 정부가 보인 태도를 보면 케넌의 글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 수 있다. 일본의 ‘용미전략(用美戰略)’은 성공했던 것이다.

게다가 탐험가 케넌은 자신보다 60년 아래의 이종사촌 동생인 조지 케넌(George F. Kennan)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중간 이름에 ‘F.’가 들어간 조지 케넌은 미국 외교정책 전문가로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의 입안자다. 그는 아시아에서 미국을 대신에 소련에 대항하게 하기 위해선 일본의 경제를 부흥시키고 재무장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일본의 보수정권은 장기집권하면서 경제성장과 군사대국을 이뤄냈다. 케넌 형제는 미국 내 친일파의 본류를 이룬 셈이다. 이들 형제의 친일논리는 1951년 9월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전쟁기념 공연예술 센터에서 맺어진 일본과 연합국 사이의 평화조약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일본 총리는 강화조약에 앞서 일본 미국대사관에서 가진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 미국특사와의 회담에서 “모든 재일조선인은 공산당”이라고 거짓 주장을 폈다. 한국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델레스 특사는 케넌의 영향을 받아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한반도 분단도 획책했다. 이번엔 ‘용소전략(用蘇戰略)’을 구사했다. 홍원식 박사는 ‘미국도, 소련도 아닌 일본의 흉계로 이루어진 조국분단’이란 글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일본은 항복하기 직전 계획적으로 한반도를 분단시킨 만행을 저질렀다. 1945년 8월8일 새벽, 스탈린을 긴급 방문한 일본 정보 요원들의 제안을 당일 실행에 옮겼다. 당일, 일제는 8월15일 항복 전에 소련군이 한반도 중 38선 이북 지역을 미리 점령할 수 있도록 협조할 것임을 극비리에 전했다. 일제의 ‘8·15 항복’이 이뤄지면 UN군은 일반명령 1호에 의거, 한반도 전역에 진주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소련 단독으로 한반도 북반부를 점령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될 터였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일본의 제안이 고맙기만 했다.” 그 결과 소련군은 1945년 8월13일까지 북한 전역을 점령했다. 이것이 한반도 분단의 시작이었다. UN이 8월15일 한반도 전역에 진주했더라면 한반도는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 2차 북미정상회담이 난항을 겪고 있는 것도 그 배후에 일본 보수세력이 미국 네오콘 (neocons)과 군산복합체를 상대로 ‘북미정상회담 반대’ 로비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강한 의혹을 지울 수 없다. 얼마 전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북한이 석간몰 기지 등 13곳을 운용하는 것을 확인했다는 보고서를 발표해 한미, 북미관계를 꼬이게 했던 논란이 그 단적이 사례다. 그 보고서는 ‘가짜뉴스’로 판명이 났지만 파장은 상당기간 지속됐다.

한일관계가 가장 원만했던 시절은 김대중 정부 때였다. 일본이 한국에 대해 꼼수를 부리지 않고 정당한 파트너로 상대해줬기 때문이다. 1998년 10월8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는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과거 역사문제와 미래 협력문제를 분리해 투트랙으로 접근하자는 게 이 공동선언의 요체다. 한일관계가 밀월관계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여기에 한일관계를 풀 해답이 있다. 물밑접촉과 물밑대화다. 당시 박태준 자민련 총재가 김대중 정부의 물밑특사로 일본을 설득했기 때문에 공동선언이 나왔다. 물론 외부로 드러나지 않은 ‘야사(野史)’가 됐다.  

문 대통령도 지난 5월 일본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올해가 이 공동선언의 20주년이 되는 점을 의식해 이 선언이 제시한 투트랙 접근이 대일외교의 기조라고 강조한 바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 14일 오전 10시 청와대 본관에서 한일 의원연맹 대표단을 접견한 자리에서도 “과거사를 직시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양국 간 미래지향적 발전관계는 별개로 진행돼야 한다는 점에는 취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며 한·일간 미래지향적 관계가 지속될 수 있도록 노력해 주길 당부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에는 김대중 정부의 ‘박태준 특사’가 없다. 아베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를 물밑에서 설득할 수 있는 당대 현자(賢者)가 필요하다. 초야를 뒤져서라도 그런 인물을 찾아야 한다. 찾으면 있을 터.
 
역사는 화석이 아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과거가 아닌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역사의 교훈’이 중요한 것이다. ‘동시성’, ‘반복’이란 말이 역사해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항구적인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일본이 미국·러시아·중국을 상대로 ‘반한(反韓)·혐한(嫌韓)로비’를 벌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담대한 지혜를 가진 현자가 절실하다. 2019년에는 반드시 한일관계가 정상화돼야 한다. 일본은 그냥 방치해선 안 되는 나라다.

조한규 중소기업신문회장·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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