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민주화운동가이며 김대중 대통령 그림자 내조
“국민 위해,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 유언

1963년 12월17일 제6대 국회 개원 일 태평로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본관)에 ‘백색(白色)’의 국회의원이 나타났다. 백색 양복을 입고, 백구두를 신고, 백색 오픈카를 타고 영화배우처럼 등장한 의원이 있었다. 목포에서 당선된 민주당 김대중 의원이다. 당시 김대중 의원은 1961년 5월14일 재보선에서 제5대 민의원에 당선됐으나 5·16군사쿠데타로 의원직을 잃었기 때문에 비록 재선이었지만 사실상 초선의원이었다.

‘백색’의 김대중 의원은 여론의 스포트라이트(spotlight)를 받았다. 이는 이희호 여사의 작품. 목포의 촌티를 벗겨내고 세련된 대중 정치인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한 이 여사의 전략은 적중했다. ‘김대중-이희호’ 두 사람이 1962년 5월10일 조향록 목사의 주례로 이 여사의 외삼촌 이원순씨의 자택(서울시 종로구 체부동)에서 결혼식을 올린 지 1년6개월 만에 ‘정치인 김대중’이 화려하게 탄생한 것이다.

과거 동교동 자택에는 지하벙커가 있었다. 출입기자 시절 몇 차례 이곳을 방문했다. 지하벙커는 미니 도서관이었다. 2만권이 넘는 서적(書籍)이 빼곡하게 정리돼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전 5권의 ‘대하소설 주원장’이었다. 빨간색, 파란색, 검정색 등으로 곳곳에 밑줄이 쳐 있었다. 다른 많은 책에도 밑줄이 그어져 있었고 간단한 독후감이 담긴 부전지도 붙어 있었다. 세종대왕이 그랬듯이 김대중 전 대통령(DJ)도 ‘독서’로 권좌에 오른 셈이다.

이 또한 이 여사의 작품. 두 사람은 1951년 부산 피난 시절 옛 서울 지역 대학생 모임이었던 면학동지회(면우회)에서 처음 만났다. 부산 감천의 오솔길을 산책하면서 읽은 책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시국얘기도 했다. DJ는 이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고, 이 여사는 평생 ‘독서내조’를 했던 것이다.

1990년대 초반 언젠가 동교동 자택의 안방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선반이 눈에 띄었다. 수십 가지의 온갖 영양제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한마디로 이 여사의 ‘DJ 건강 챙기기’는 현란할 정도다. 이런 에피소드도 있다. DJ가 아태재단이사장 시절인 1990년대 중반 태국을 방문하게 됐다. 이 여사는 동교동 자택을 나서는 DJ에게 깨끗한 손수건을 건넸다. 그리고 신신 당부했다. “호텔 방문을 열 때나 어떤 물건을 잡을 때, 반드시 이 손수건을 대고 하세요.” 당시는 영국의 전설적인 록 그룹 퀸(Queen)의 보컬인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가 에이즈로 사망해 전 세계가 에이즈 공포에 휩싸였을 때였다. 외국에서 어떤 물건이든지 직접 만지지 말라는 세심한 당부였던 것이다.

이 여사는 명필(名筆)이다. 만년필 글씨가 일품이다. 1992년 12월19일 14대 대통령선거 다음날. 필자는 아침 일찍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민주당 기자실에 갔다. 과연 DJ가 오늘 정계은퇴를 선언할까. 이날 새벽에 작성한 ‘김대중 정계은퇴’ 특종 보도(세계일보, 1992년 12월19일 1면, 이승현 조한규 기자)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DJ 정계은퇴 선언문은 오전 10씨쯤 기자들에게 배포됐다. 필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순간 눈을 의심했다. 수기(手記)로 된 선언문의 글씨가 눈에 띄는 명필이었기 때문이다. 박지원 수석부대변인에게 물어봤다. 누가 쓴 것이냐고. DJ의 구술을 이 여사가 만년필로 정리했다고 했다. 이 여사는 DJ의 연설문도 내조했던 것이다.   

1980년 신군부가 조작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DJ가 사형을 선고받았을 때도 이 여사는 이런 편지를 옥중으로 보냈다. “당신은 언제나 피눈물 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바르게살기 위해 발버둥 쳤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유난히 강했습니다. 그래서 받은 것이 고난의 상입니다.” 맹자의 고자장(告子章)을 연상시킨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히고, 근육과 뼈를 깎는 고통을 주고, 몸을 굶주리게 하고, 생활은 빈궁에 빠뜨려 하는 일마다 어지럽게 하느니라.”

남다른 실력을 갖춘 1세대 여성운동가이자 민주화운동가였던 이희호 여사는 2019년 6월10일 오후 11시37분 97세의 일기로 타계하면서 두 가지 유언을 남겼다. “첫째, 우리 국민께서 남편 김대중 대통령과 자신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다. 우리 국민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해서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바란다.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국민을 위해,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 둘째, 동교동 사저를 ‘대통령 사저 기념관(가칭)’으로 사용하도록 하고 노벨평화상 상금은 대통령 기념사업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도록 하라. 김대중 대통령 기념사업과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을 위한 김대중 평화센터 사업을 잘 이어가도록 하라.”

‘김대중 이희호’는 부부 이상의 관계다. 두 사람 모두 민주 인권 평화의 ‘행동하는 양심’이다. 동교동 자택 대문 옆에는 ‘김대중’ ‘이희호’ 문패가 걸려 있다. ‘동반자’이자  ‘동업자’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의 미래세대에게 가장 이상적인 부부관계를 보여준 것이다.
                                                                              
조한규 중소기업신문회장·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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