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첨단 기술 훔쳐가 경제 패권을 차지하려는 중국 야심 용납 못해
정치적 혈맹인 미국과 경제적 의존도 높은 중국에 낀 한국 고민 깊어

“요코하마 항구에 캘리포니아산(産) 오렌지를 후지산보다 더 높게 쌓아 올려도 미·일 무역 역조는 개선되지 않는다.”

1980년대 중반 미국의 대(對)일본 무역 적자가 폐쇄적인 일본 시장 때문이라는 미국 측 주장에 대해 제조업의 경쟁력 차이가 본질적인 원인이라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소니(Sony) 회장이 한 말이다. 일본이 시장을 개방해도 경쟁력있는 미국 상품은 농산물밖에 없다는 것을 캘리포니아산 오렌지에 비유한 것이다. 반면 일본은 전자, 자동차, 철강 등 고부가가치 제품을 중심으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 요코하마 항구에 후지산보다 더 높게 쌓일 만큼 오렌지를 수출해도 무역 역조는 쉽게 개선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시기 미국의 제조업은 급속도로 경쟁력을 잃어갔다. 미국 제조업의 경쟁력 상실 원인은 1980년대 초 출범한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행정부의 경제·통화 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레이건 행정부는 이전 정부에서부터 이어진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고금리를 통한 엄격한 금융 긴축 정책을 시행했다. 고금리 정책 덕분에 인플레이션은 진정되었지만, 이로 인해 기업 투자가 위축되는 등 제조업이 초토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미국은 이전 세대 세계의 공장에서 공산품을 대량으로 수입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때 무너진 미국 제조업의 틈새를 메워 나간 일본이 제조업 최강국의 위치에 올랐다. 이것이 1980년대 미국의 대(對)일본 무역적자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미국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무역 적자를 타개하기 위한 플라자 합의(Plaza Agreement)에 나섰다. 플라자 합의는 1985년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G5(프랑스, 서독, 일본, 미국, 영국) 재무장관들의 모임에서 발표된 환율에 관한 합의로, 미국의 무역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달러화 가치를 내리고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 가치를 높이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합의 채택 일주일 만에 독일 마르크화는 약 7%, 엔화는 8.3%가 상승했다. 이후 2년 동안 달러는 30% 이상 급락했는데, 특히 엔화 대비 달러 가치는 50% 가까이 하락했다. 합의 이전 1달러에 235엔이던 환율이 1988년 초에는 120엔까지 떨어졌다.

플라자 합의는 예상보다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이 가장 직접적인 타격을 받았다. 급격한 엔고의 영향으로 수출이 감소하고 성장률이 떨어지자, 일본 정부는 경기 부양책을 위해 금리 인하와 부동산 대출 규제 완화책을 썼다. 이 결과 일본의 부동산 시장과 주식시장에는 엄청난 거품이 생기게 되었다. 일본 경제의 ‘잃어버린 20년’이 플라자 합의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반면 미국은 대일 무역적자를 크게 줄이지는 못했지만, 달러화 약세에 힘입어 점차적으로 수출 경쟁력을 회복해 나갔다. 특히 기업 투자가 활성화되면서 2000년대 이후 IT 산업을 중심으로 미국 경제가 세계 경제를 선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상이 1980년대 미국 제조업의 붕괴와 일본 제조업이 부상, 그리고 플라자 합의를 통해 미국이 다시 주도권을 잡아가는 과정을 간략하게 요약한 것이다. 그런데 30여 년 전 미·일 무역 마찰이 다시 관심을 받는 이유는 최근 진행되고 있는 미·중 무역전쟁과 닮은꼴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거시경제 지표를 보면 당시 미·일 갈등과 현재의 미·중 갈등은 공통점이 있다. 1981년 미국의 무역적자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42%였으며, 2018년 미국의 무역적자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48%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과거 일본과 현재 중국이 미국을 상대로 대규모 무역 흑자를 내고 있는 원인이 ‘시장 개방에 소극적인 보호주의 정책’, ‘환율 조작’, ‘미국의 첨단기술 도용 혹은 절도’ 등 부당한 방법에 있다고 미국이 의심하는 점도 비슷하다.

이러한 이유를 들어 일부에서는 미·중 무역전쟁도 과거 일본의 경험을 토대로 제 2의 플라자 합의와 같은 결론이 도출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전개되고 있는 양상은 무역전쟁에서 기술전쟁으로 확산되는 등 갈등의 강도가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이는 미국의 전략이 과거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일본의 경우 무역 마찰은 있지만 동반자적인 관계를 염두에 두고 무역적자 해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즉 시장 개방 확대와 환율 조작 방지 등의 조치로 미국과 일본은 공동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다. 하지만 현재 미국의 중국 전략은 무역 적자 해소에 그치지 않고 있다. 미국의 첨단 기술을 훔쳐가 세계 경제 패권을 차지하려는 중국의 야심을 꺾어 놓겠다는 의도가 더 크다. 미국의 ‘화웨이 때리기’에서 보듯 중국이 기술적으로 미국을 넘어서는 것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무역전쟁을 넘어서 기술전쟁으로 번지고 있는 미·중 갈등은 과거 미·일 간 무역 마찰보다는 미국과 소련으로 갈라선 냉전 시대와 비교하는 것이 더 가깝다. 이는 단순히 경제적인 합의로 사태를 해결할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정치적 혈맹 관계인 미국과 경제적 의존도가 높은 중국 사이에 낀 우리나라는 이래저래 고민이 깊어 질 수밖에 없다.

이원호 논설위원·경제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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