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고 담대한 자세로 대하고, 아베와 담판할 수 있는 특사 파견해야

“선조 27년(甲午·1594) 4월, 사명은 울산 서생포(西生浦)에 있던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진중으로 들어간다. 대사는 왜적의 군사들이 수리(數里)에 줄지어 섰고 창과 칼이 숲을 이룬 속에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자연스럽게 담소(談笑)하였다. ‘당신네 나라에 보배가 많지요’라는 청정의 물음에 사명은 서슴없이, ‘우리나라에는 별달리 보배가 없고 오로지 장군의 머리를 보배로 여긴다’고 대답했다. 의아해 하며 ‘그게 무슨 말이냐’는 청정의 반문에 대사는 ‘우리나라에서는 1천근의 황금과 1만호의 식읍(食邑)을 현상금으로 내걸고 장군의 머리를 구하니 보배가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콧대 높은 청정도 한 풀 기가 꺾여 크게 웃고 말았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왜장(倭將)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진영에 들어가 담판을 할 때 대화록 일부를 기록한 내용이다. 사명대사의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과 19세기 말 범해(梵海)각안(覺岸)선사가 편저한 ‘동사열전(東師列傳)’의 ‘사명존자(泗溟尊者)’ 편에 실려 있다. 

사명대사는 또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일본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서도 “두 나라 백성들이 오랫동안 도탄에 빠져 있으므로 나는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 왔노라”고 말했다고 한다. 허균(許筠)의 ‘자통홍제존자 사명송운대사 석장비명 및 서문’에 기록돼 있다.

사명대사의 이러한 ‘정일(征日)활동’은 최근 일본의 ‘경제침략’을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가에 대한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때와 1604년 일본에 건너가 펼친 ‘정일활동’의 역사적 교훈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명대사는 강하고 담대했다. 그는 적진에 들어가 기요마사에게 “그대의 목이 보배”라고 질타했다. 이에야스에게는 “너희를 구제하기 위해 왔다”며 당당하게 행동했다. 사명대사는 일본인들이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하다는 사실을 직시했기 때문에 시종 당당하고 의연하게 행동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일본을 상대할 때 절대로 비굴한 모습을 보여줘선 안 된다. 강하고 담대한 자세로 상대해야 한다.

둘째, 국익과 백성 위주의 외교적 협상력을 발휘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와 일본 간은 조선을 배제하고 강화교섭을 추진했다. 강화조건은 다섯 가지.  일왕과 더불어 결혼할 것(명나라 황제의 딸을 일본 왕후로 삼는 것)  조선의 8개 도 중 4개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전과 같이 교린(交隣)을 지속할 것   조선 왕자 1인을 일본에 영주토록 할 것  조선의 대신대관을 인질로 보낼 것 등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래서 사명대사는 명나라 심유경(沈惟敬)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간의 비밀 강화교섭을 저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정확한 정보수집과 교란-설득을 병행한 협상을 통해 성공했다. 외교는 그저 대화만 하는 게 아니다. 동원할 모든 수단을 다 활용해야 한다. 상대가 변하기를 기다려선 안 된다.

셋째, 최고 권력자를 직접 만나 담판 협상을 벌여 성공했다. 사명대사는 대마도에만 머물지 않고 위험한 본토에 들어가 이에야스를 직접 만났다. “구름은 푸른 하늘에 있고 물은 병 속에 있으니 저마다 있어야 할 곳에 있으면서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며 일본인들 역시 전쟁의 또 다른 피해자임을 일깨웠다. 대화와 협상을 통해 두 나라의 국교를 정상화함으로써 선린우호관계를 확립하는 터전을 마련했다. 아울러 잡혀간 동포 3500명을 데리고 귀국했고, 왜군들이 통도사에 난입해 탈취해간 ‘부처님의 진신 치아사리’ 등 보물을 되찾아왔다. 따라서 정부는 한 일 경제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선 적절한 시점에 아베신조 일본총리와 담판을 할 수 있는 특사를 보내야 할 것이다.

넷째, 사명대사는 설법(說法)과 문화 활동을 통해 일본의 오피니언 리더들을 교화시켰다. 그는 9개월 동안 일본을 주유하면서 이에야스의 주변 고승(高僧)들과 차남 유키 히데야스(結城秀康)을 비롯해 각계 인사들에게 불법을 강설했다. 시문(詩文) 찬(贊) 글(書)을 써 주는 등 다양한 문화 활동을 전개했다. 후일 조선 통신사의 문화외교활동의 선구로, 바쿠후 시대 260년 간 조선과 일본이 친선우호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일 경제전쟁 해법 역시 문화적 사상적 접근을 통해 그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사명대사는 대마도 승려 만실(萬室)에게 준 선시(禪詩)의 심오한 철학이 가슴을 때린다. “정중편(正中偏)이요 편중정(偏中正)이니/정(正)이 가고 편(偏)이 오면 이사(理事)가 온전하리/다시 정중래(正中來) 향해 보면/전과 같이 다시 정중편(正中偏)으로 들어간다.”

중국 당나라 승려 동산양개(洞山良介)가 제창한 ‘편정오위설(偏正五位說)’을 요약해 설법한 것이다. 이는 불교 선종의 한 파인 조동종(曹洞宗)의 중심사상이다. 여기서 ‘정(바름)’은 우주의 본체로 ‘이(理)’요, ‘편(치우침)’은 우주의 현상으로 ‘사(事)’이다. 전자는 평등, 후자는 차별을 각각 의미한다. 

‘정중편’은 본체 그대로가 곧 현상이고, ‘편중정’은 현상 그대로가 곧 본체이며, ‘정중래’는 본체는 현상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정중편’은 평등 속에서 치우침을 보는 것이고, ‘편중정’은 치우침 속에서 평등을 보는 것이며, ‘정중래’는 평등이 차별과 다르지 않고 차별이 평등과 다르지 않아 평등이 곧 차별이요, 차별이 곧 평등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명대사는 ‘정(正)과 편(偏)의 합일(合一)’, ‘이(理)와 사(事)의 합일’을 설파한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은 둘이 아니다’는 불이(不二)사상, 즉 중도(中道)사상으로 조선과 일본이 친선우호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던 것이다. 이런 중도사상은 바쿠후의 정치철학이 됐으며, 일본 근대화의 사상적 토대가 됐다. 그러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다카스키 신사쿠(高衫晋作) 등 19세기 말 정한론(征韓論)자들은 이를 버렸다. 야만적인 왜구(倭寇)으로 돌아간 것이다. 아베가 이들의 ‘침략DNA’를 버리지 않는 한, 일본은 ‘편’에만 머물고 ‘정’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파멸의 길이다.   

조한규 중소기업신문회장·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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