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 전철 안 밟겠다며 무력 진압하면 사태 더 악화
홍콩인들의 민주적 요구 사항 수용하는 포용력 필요해

"세계에 알린다. 중국은 이미 1842년의 중국이 아니다."

홍콩에서 범죄자 인도법안으로 인해 촉발된 반 중국 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가 최근 소셜미디어 계정에 올린 동영상의 내용이다.

미국 영사가 홍콩 시위 주도자를 만난데 이어 영국의 신임 외무장관이 캐리 람 홍콩 특구 행정장관과 통화한 일로 외세 개입 논란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이 영상이 공개된 것이다.

홍콩인들이 시위에 나선 이유는 범죄자 인도법안이 통과될 경우 반체제인사, 인권운동가 등의 중국 인도가 현실화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격렬한 시위에 놀란 홍콩 정부가 이 법안의 폐기를 선언했지만 시위는 그치지 않고 있다. 배후에 있는 중국의 반민주적 행태에 대한 우려가 해소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민일보가 올린 동영상을 보면 중국이 홍콩 시위에 대해 어떤 시각으로 대처하고 있는 지를 파악할 수 있다. 홍콩인들의 우려는 도외시한 채 외부의 개입만 막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1842년은 청나라가 영국과 2년 동안 치른 아편전쟁에서 패한 뒤 난징조약을 맺고 홍콩을 영국에 넘긴 해다. 홍콩 할양 외에도 청나라는 광저우를 포함한 5개의 항구 개항, 아편 몰수에 대한 배상금 지불, 영국 상품에 대한 무관세, 영사재판권 허용 등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난징조약 이후 청나라 내정은 혼란에 빠져 외세의 침략을 부채질했다. 특히 1894~1895년 청일 전쟁에서 일본에 패한 이후에는 일본의 중국 진출을 억제하기 위해 영국은 물론, 프랑스, 러시아, 독일 등을 불러들여 그 대가로 영토 할양, 특권 허가 등을 통해 반식민지로 전락했다. 중국이 완전한 식민지가 되지 않은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한 나라가 중국을 독차지하지 못하도록 열강들이 서로 견제했기 때문이었다. 

2차 대전 이후 국권을 회복한 중국은 영국과 여러 차례 회담을 거쳐 홍콩을 반환받는 등 침탈의 흔적을 지웠지만, 아편전쟁과 난징조약이 외세 침탈의 기폭제 역할을 했던 만큼 외세의 개입에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굴욕적인 아편전쟁을 되새기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홍콩 시위에 대한 외부의 개입, 특히 미국의 개입에 대해 아편전쟁 당시 영국이 지녔던 의도와 비슷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미국이 미중 간의 무역 전쟁 와중에 홍콩을 문제 삼아 중국을 흔들려고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편전쟁은 무역 전쟁이었다. 전쟁이 치러지기 전 청나라는 경제적으로 전 세계의 중심지였다. 무역 수지만 보면 모든 나라를 대상으로 무역 흑자를 냈다. 무역이 지금처럼 글로벌화 돼있지 않은 상황이었고 무역품목도 다양하지는 않았지만, 중국은 비단, 도자기, 차 등 다양한 품목을 수출하면서도 수입은 거의 없는 절대 흑자국이었다.

전쟁을 도발한 영국만 해도 중국산 품목의 최대 수입국 중 하나였다. 영국은 무역 역조를 개선하기 위해 식민지 인도에서 싼 값에 생산한 면직물을 내세웠지만, 환영받지 못했다. 중국에는 더 좋은 면직물을 더 싼값에 생산할 수 있을 만큼 인구가 넉넉했다.

그동안 영국이 꾸준히 중국의 비단이나 차를 수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채굴돼 유럽으로 무한정 쏟아져 들어왔던 은으로 수입대금을 지불할 여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19세기 중반까지 전 세계 은 유통량 가운데 아메리카에서 생산한 양이 85%에 달했고, 전 세계 은 유통량의 3분의 1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갔다는 연구도 있다.

그러나 은만 믿고 무역 역조를 그대로 놓아둘 수 없다고 판단한 영국은 명나라 시대부터 중국 상류층들 사이에서 사치품으로 유행하던 아편을 싼 값에 청나라로 밀수출했다. 아편은 빠른 속도로 퍼졌고, 중독자가 넘쳐나면서 청나라의 사회, 경제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 대신 영국은 무역 역조를 개선할 수 있었다.

결국 청 당국자가 나서 아편 몰수와 수입 금지라는 강경책을 쓰자 영국은 전쟁을 시작했다. 이는 제국주의 시대 부도덕성의 결정체를 드러낸 행위였다. 영국 내에서도 아편 수입 금지를 이유로 전쟁에 나서는 데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있었지만 영국 내각은 전쟁을 강행했고, 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난징조약이라는 굴욕을 맞봤던 것이다. 당시 청나라 병력이 힘을 못 쓴 이유는 아편에 중독돼 제 역할을 못했다는 말도 있을 정도로 아편이 만연했다.

이 같은 곡절을 겪은 중국이 미국과의 무역 전쟁 와중에 아편전쟁을 떠올린 건 당연할 수 있지만, 문제는 홍콩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중국 정부에 대한 홍콩 시민들의 항거를 대하는 자세다.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한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모든 문제를 힘으로 해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무력 진압이야말로 외부의 개입을 자초하는 일이 될 것이며, ‘1842년의 중국이 아니다’라는 말도 공허한 외침에 그칠 것이다. 중국으로선 또 다시 뼈아프게 홍콩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외부의 개입을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홍콩인들의 민주적 요구를 수용하는 포용력이 필요해 보인다.

곽영완 국제·역사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중소기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