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문물 무조건 따르고 동양은 폄하하는 이중적 태도 심각
습관적인 왜곡된 역사관 시정하지 않으면 세계선도 국가 못돼

최근 들어 일본 언론들은 한국에 대한 무역보복은 오히려 여러 면에서 일본의 손해가 되고 있는데, 이는 아베의 판단 착오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는 비판하는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다. 자국에서조차 비판받는 아베의 무역보복은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이는 치졸한 역사 인식에 바탕을 둔 것이다. 

독일의 인류학자인 안드레 군더 프랑크는 “역사는 19세기 서구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19세기 이전에도 역사를 논한 인물들은 많았다. 서양에는 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기록을 담은 ‘역사’라는 이름의 책을 써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가 있고, 동양에는 사기를 쓴 사마천이 있다. 이들 외에도 역사를 주제로 책을 쓴 인물들은 많다.

하지만 이들은 역사를 있는 그대로, 또는 조금 과장해서 썼을 뿐 역사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역사가 19세기 서구의 발명품이라고 하는 이유는 서구인들이 세계 역사를 자신들의 입장에서, 즉 서구중심으로 서술했기 때문이다. 서구인들은 15세기 말 대항해 시대 이후 서서히 유럽을 벗어나 전 세계를 장악한 19세기 들어 본격적으로 세계 역사를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왜곡했다.

서구중심적인 시각이 그대로 드러난 것 중 하나가 인종 차별이다. 그 근원은 1859년 초판이 발행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다. 종의 기원은 생물의 진화에 관한 연구서로, 핵심은 돌연변이와 진화를 통해 다양한 종들 간에 우열이 생겼다는 것이다. 서구 역사학자들은 다윈의 진화론을 엉뚱하게 인종간의 우열을 가르는데 활용했다. 어떤 인종은 우월한데, 어떤 인종은 열등하다는 이론을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우월한 인종은 서구인들이었다. 그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19세기에 절정을 이루던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단 하나의 문제 국가가 등장해 이 같은 주장에 허점이 생겼다. 바로 일본이었다. 유일하게 서구에 속하지 않는 일본이 자신들과 동등하게 식민 제국주의를 이루며 경쟁을 벌인 것이다. 서구인들의 시각에서는 인종적으로 우월한 서구인들만이 다른 인종들을 지배해야만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데, 일본은 예외였던 것이다.

이 문제는 생각보다 아주 쉽게 해결했다. 일본을 서구 국가와 동등하게 취급한 것이다. 일본이 일찍부터 ‘서구의 가치’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서구 국가와 다를 게 없다고 ‘승인’해준 것이다. 이는 1904년 일본이 러시아와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서구의 평가에서도 드러난다. 당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일본인들은 멋지고 문명화된 국민이며, 문명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동등하게 대우받을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 일본의 예외성은 1867년 메이지 유신 이후 짧은 시간 내에 산업화에 성공한 것과 관계가 있다. 하지만 그 시기는 지금과 같이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산업화도 특정 국가만 할 수 있던 게 아니었다. 산업혁명은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시작됐지만 유럽 각국에서 진정한 산업화가 이루어진 것은 19세기 중반이었다. 증기기관이 발명된  지 거의 1세기가 흐른 뒤에나 진정한 산업화가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는 일본이 자신들과 동등하다는 프레임을 짜 인종 차별과 식민 지배를 당연시했다. 

아시아의 일본이 유럽 각국과 비슷한 시기에 산업화를 이뤘다는 건 다른 아시아권 국가에도 산업화의 기반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다만 일본은 아시아의 이웃 나라들이 미처 산업화를 진행하기도 전에 식민지화 해 그 기회를 빼앗았을 뿐이다. 일제 식민지배 기간 동안 모든 것을 수탈당하고 해방된 직후 1950년부터 3년 동안 전쟁을 치르며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었던 한국이 불과 20여년 지난 70년대에 산업화에 성공했고, 지금은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갖춘 것만 봐도 이는 증명이 된다.

어쨌든 20세기 초 뜻밖에 서구로부터 자신들과 동등하다는 칭찬을 들은 일본은 문명화라는 미명 하에 서구의 가치를 들먹이며 폭력적인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던 서구인들처럼 역사 왜곡을 통해 식민 지배를 단행했다. 지금도 일제의 식민 통치 시절 남겨진 식민사관을 그대로 답습하는 학자들이 있는 것을 보면 역사 왜곡은 꽤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에도 일본은 서구 지향적인 사고를 더욱 굳히며 서구의 입맛에 맞는 행동들만 골라서 취하고 있다. 미국에는 쓸개까지 내줄 정도로 우호적인 반면 이웃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 국가들에는 지나치리만큼 비우호적이다. 일부 극우들은 아예 자신들의 피가 코카서스, 즉 서양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망발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서구 지향적이다.

이처럼 서양에 대해서는 무조건 어필하고자 하면서 반대로 동양에 대해서 폄하하는 하는 것은 역사 인식 자체가 과거에 머물러 있고 편협하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원전과 관련해 최근 드러나고 있는 거짓말들도 우월적 지위를 활용해 왜곡을 일삼던 과거 시대의 유산이다. 불리한 것은 감추고 유리한 것만 드러내는 왜곡이 습관화된 것인데, 지금과 같은 정보화시대에도 그 같은 거짓이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본인들을 보면 원전 사고와 같은 불행도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있을 것이다.

한국에 대한 무역보복과 관련해 일본 언론에서 한국의 대처를 예상하지 못해 잘못된 선택을 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도 자신들이 왜곡시킨 것을 스스로 믿는 어리석음이 원인일 것이다. 일본이 근대 들어 일시적 승자가 된 뒤 습관적으로 단행하는 왜곡된 역사관을 지금이라도 바로 잡지 않는다면 앞으로 영원히 역사의 패자가 될 것이다.  

곽영완 국제·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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