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기업에 직접 유동성 공급 방안 마련해야

지난달 26일 한국은행은 금융통화위원회를 열고 4월부터 6월까지 석 달 동안 금융기관에 무제한으로 유동성을 공급하기로 결정했다. 매주 1회 환매조건부채권(RP)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은행과 증권사가 보유한 국채와 지방채, 은행채 등을 한국은행에 맡기고 기준금리(0.75%)에 0.1%포인트 가산된 이자로 자금을 빌려주는 채권 담보 대출이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때도 쓰지 않았던 수단이라는 점에서 한국은행이 현재의 위기 상황에 엄중하게 대처해 나가겠다는 의지로 읽혀지는 대목이다.

이처럼 한은이 전에 없던 강력한 처방전을 내놓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 조짐을 보이면서 생산과 소비가 위축되는 등 경제활동 전반에 빨간불이 켜지면서 기업의 자금난이 극심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세계 각국이 주가가 폭락하면서 증권회사에서 운용 중인 ELS(주가연계증권)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일시적으로 자금난에 몰린 증권사들에게 유동성을 공급해 금융부문의 위기를 사전에 차단하고자 하는 것이다.

시장에서는 한은의 이번 조치를 두고 사실상 ‘한국판 양적완화’로 보고 있다. 실제로 윤면식 한은 부총재도 인터뷰를 통해 “시장 수요에 맞춰 유동성을 전액 공급하는 것이라 양적 완화라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양적완화’가 아니라 ‘사실상 양적완화’ 혹은 ‘양적완화라고 봐도 틀리지 않는다’는 표현은 이 조치로 거둘 수 있는 경제적 효과가 다소 제한적일 수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양적완화란 정책금리가 0%에 근접해 금리 인하를 통한 경기 부양이 한계에 봉착했을 때 중앙은행이 국채매입을 통해 유동성을 시중에 공급하는 정책을 말한다. 이를 통해 중앙은행은 금리를 더 낮추지 않고도 유동성을 충분히 공급해 경제를 살리는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한은 기준금리가 0.75%에 달해 금리인하를 통해 경기를 부양하는 정책적 수단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권매입을 통해 금융기관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방식을 선택한 우리나라는 전형적인 형태의 양적완화와는 다를 뿐만 아니라 효과 면에서도 차이가 난다.

미국의 경우 지난달 23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발표한 무제한 양적완화의 내용을 보면 중앙은행이 금융사가 갖고 있는 국채를 매입하는 것뿐만 아니라 회사채와 기업어음(CP)까지 사들여 자금줄이 마른 민간 기업에게 직접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무제한 양적완화를 통해 침체된 경제를 살리겠다는 확실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반면 한국은행은 금융사를 대상으로 채권 담보로 자금을 풀고 있다. 이는 민간기업보다는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금융사에 우선적으로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한은이 이번에 ‘한국판 양적완화’ 조치를 발표하면서 공개시장운영 대상 기관을 기존 은행 16곳, 증권사 5곳에서 증권사 11곳을 추가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최근 들어 단기 자금조달이 막혀 유동성 위기에 빠진 증권사들에 대한 지원이 우선 목표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은의 조치가 금융사들에게는 가뭄의 단비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시장의 반응은 일단 긍정적이다. 하지만 금융사에 지원된 자금이 실제로 얼마나 기업으로 흘러 들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에는 다소 회의적이다. 이 점에 대해 경제계에서는 한은이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처럼 민간 기업에 직접 자금을 공급하는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오는 17일에 통계청이 3월 고용동향을 발표하고, 이어 한국은행은 23일 1/4분기 국내총생산(GDP) 속보치를 내놓는다. 그리고 다시 통계청은 29일 3월 산업활동동향을 발표한다. 최근의 경제 동향을 나타내는 통계치가 하나씩 발표될 때마다 우리 경제는 커다란 충격에 빠질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한은이 직접 나서서 민간 기업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은은 한은법상 민간 발행 채권 매입은 불가하다면서, 회사채를 매입하기 위해서는 정부 보증이 필요한데 이는 국회에서 동의를 얻어야 한다며 주저하고 있다. 하지만 전대미문의 위기상황에서 기업의 줄도산을 막기 위해 한은이 총대를 메고 국회 설득에 나서야 할 것이다. 명분이 있기 때문에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기업이 살아남아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이원호 논설위원‧경제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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