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한국경제…환율에 달렸다
트럼프 리스크·계엄 충격에 1450원 찍고 1500원 전망도 기업들 비명…인플레 재발우려에 1월 금리인하도 딜레마 "외환보유 충분 IMF 때와 달라" "환율 방어로 달러 소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미국 대선 승리와 비상계엄 선포 사태를 거치면서 원달러 환율이 금융위기 이후 15년 만에 1450원을 넘어섰다. 올해 초 1300원대였던 환율은 어느덧 1400원대로 치솟으면서 환율 상황에 예민한 중소기업들의 비명도 커지고 있다. 국가적으로는 외환보유액 감소에 대한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으며 힘들게 잡은 인플레이션이 다시 재발하는 것이 아니냐는 공포가 일렁이고 있다.
◆ 트럼프 리스크에 계엄까지…환율 1450원 돌파
20일 서울 외환시장에 따르면 이날 오전 2시 원달러 환율은 전장 서울환시 종가 대비 11.80원 상승한 1447.3원에 거래를 마감했다. 정규장에서 1451.9원을 기록했던 환율은 국민연금의 전략적 환헤지가 1450원 수준 안팎에서 시작될 수 있다는 관측이 퍼지면서 상승 폭이 꺾였다. 국민연금은 자체 계산하는 장기평균 환율에서 일정한 표준편차(σ·시그마)를 적용해 전략적 헤지를 실행하는데 발동 조건이 1450원 안팎인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1월 2일 1312.0원이었던 환율은 트럼프 당선과 비상계엄 선포 사태를 거치면서 1년 만에 100원 넘게 급등했다.
iM증권 박상현 연구원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통화정책 기조 전환 등으로 한국은행의 1월 금리인하 가능성이 다소 불확실해졌으나 여전히 경기 상황을 고려할 때 1월 추가 금리인하 가능성은 열려 있다"며 "여기에 10~30조원 수준의 추경 편성이 불가피하다는 점, 정치 불확실성 리스크가 진정되지 못하고 있음은 원화 가치에 부담을 줄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전날 연준은 시장의 예상대로 0.25%포인트 금리인하를 단행했으나 내년 금리인하 횟수를 종전 4회에서 2회로 줄여 시장의 큰 충격을 안겼다. 연준은 금리인하 속도 조절의 배경으로 여전히 끈적한 인플레이션을 언급했는데 결국 장기간 금리동결 후 연준이 다시 금리 인상으로 통화정책을 전환할 수도 있다는 공포심이 시장을 짓눌렀다.
금리 선물시장은 내년 1월 금리 동결 가능성을 90% 이상으로 가격에 반영하고 있다. 주요 6개 통화에 대한 달러화 가치를 반영하는 달러인덱스(DXY)는 전날 108선을 넘어선 뒤 이날 한때 108.5 부근까지 상승했다. 2년여만의 최고치를 기록했다.
◆ 중소기업 아우성·인플레이션 우려까지…우울한 경제
원화 가치 하락은 경기 변동성에 상대적으로 더 취약하고 민감한 중소기업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전날 최근 불안정한 국내 경제 상황과 관련해 수출 중소기업의 피해 현황을 파악하기 위한 긴급실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수출 중소기업의 주요 피해 사례는 '계약 지연, 감소 및 취소’가 47.4%로 가장 많았으나 고환율로 인한 문제 발행도 22.2%로 3위를 차지했다. 정부가 현재 상황 극복을 위해 중점적으로 추진 해야 하는 정책으로도 '국가 대외신인도 회복 방안 마련'(74.7%)에 이어 '환율 안정화 정책 마련'(55.2%)이 뒤를 이었다.
원자재를 수입해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기업들은 환율 상승으로 당장 출혈이 불가피해졌다. 납품단가 연동제가 올해 초 시행되긴 했으나 현실적으로 법안이 시장에 적용되고 안착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중소기업들은 손실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특히 3개월 만기 '유전스(Usance)'를 쓰는 기업들은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유전스는 은행이 수입대금이 필요한 기업에 실행하는 일종의 단기 무역 대출이다. 상환할 때는 달러를 사용하는데 환율이 오르면 유전스 상환 시점에 더 많은 원화를 지출해야 한다.
환율 상승과 직결되는 수입 물가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실제로 지난달 수입품을 포함하는 국내 공급 물가가 크게 상승하고 생산자물가 역시 4개월 만에 상승세로 돌아서면서 힘들게 꺾어놓은 인플레이션이 다시 재발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수입 물가 오름세는 향후 소비자물가 등에도 상방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이날 한국은행이 발표한 11월 국내 공급물가지수는 10월(123.47)보다 0.6% 오른 124.15(2020년 수준 100)로 집계됐다. 지난 4윌(1.0%) 이후 7개월 만에 가장 큰 폭의 상승이다.
11월 생산자물가지수는 10월(119.01)보다 0.1% 오른 119.11로 집계됐다. 이 지수는 지난 7월 119.56을 기록한 뒤 8월 119.38, 9월 119.16, 10월 119.01 등으로 하락하다가 4개월 만에 반등했다. 지난해 11월보다는 1.5% 올라 전년 동월 대비로 16개월째 상승세를 유지했다. 국내 출하에 수출품까지 더한 11월 총산출물가지수 역시 0.6% 상승했다.
이문희 한은 물가통계팀장은 "공급 물가는 생산자물가와 수입 물가를 결합해 산출한다"며 "통관 시점 기준 수입 물가가 원달러 환율과 국제 유가 상승으로 생산자물가보다 큰 폭으로 올랐다"고 설명했다.
이어 "환율 상승 영향은 원화 기준 수입 물가에 반영되면서 시차를 두고 생산자물가나 소비자물가에도 반영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 복잡해진 한국은행의 셈법…내수경기vs환율
내년 1월 13일 통화정책방향 회의를 가질 한국은행의 속내도 복잡해졌다. 탄핵 사태와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등 경제 위험 요소를 고려하면 기준금리를 내려 경기를 부양할 필요가 있으나 미국의 금리인하 폭과 속도가 줄어들면 그만큼 환율 부담도 커질 수밖에 없다. 한은의 금리인하로 국내 경제가 불안하다고 인식한 외국인들의 자금 이탈이 더욱 빨라질 수도 있다.
문제는 한은이 연속 금리 인하로 경기 부양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다. 앞서 지난 17일 열린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회의에서 다수 의원은 이 총재에게 "임시 금융통화위원회라도 열어 기준금리를 선제적으로 인하할 계획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 총재는 일단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부인했으나 전반적 경기 부양 필요성에는 공감하는 분위기다.
그는 18일 기자간담회에서 "경기 하방 압력이 큰 상황에서는 가급적 여·야·정이 빨리 합의해 새로운 예산을 발표하는 게 경제 심리에도 좋다"며 "경기를 소폭 부양하는 정도의 재정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FOMC 회의 전 관측이지만 해외 투자은행(IB)들 사이에서는 한은의 1월 인하를 높게 점치는 분위기다.
씨티는 최근 보고서에서 "한은은 계엄 사태에 대응해 안정적 경제성장을 최우선 과제로 인식할 것"이라며 "내년 1월 0.25포인트 추가 금리 인하를 단행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 외환보유액 4000만달러 지킬까…'IMF 트라우마' 발현
1450원이라는 환율이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이외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수준인 만큼 시장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만약 환율이 계속 치솟아 1500원대까지 오른다면 외환 당국이 환율 방어를 하는 과정에 외환보유액이 대폭 줄어들 수 있다는 위기론도 제기된다.
지난달 말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은 4153억9000만달러로 지난 2021년 10월 4692억1000만달러로 역대 최대를 기록한 뒤 이후 3년 동안 감소하는 추세를 보여왔다. 특히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난 2022년 5월 이후 지난달 말까지 300억달러 이상 줄었다.
규모만 보면 지난 10월 말 기준으로 중국, 일본, 스위스, 인도, 러시아, 대만, 사우디아라비아, 홍콩에 이어 세계 9위 수준이나 환율이 1500원을 넘는다면 당국이 외환보유고를 풀어 시장 개입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
일각에서는 당국의 시장 개입이 본격화하면 외환보유액이 금세 4000억달러 밑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위기 정도가 백두산이었고 2008년 금융위기가 한라산이었다면 현재는 지리산까지 올라왔다는 불안이 팽배한 상황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전날 오후 물가안정목표 운영상황 점검 설명회에서 "앞으로도 변동성이 커지면 계속 스무딩 오퍼레이션(미세 조정)을 할 것"이라며 "외환보유액이 4000억달러 밑으로, 4100억달러 밑으로 내려가는 정도는 아니다"라고 말했으나 시장은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다.
NH투자증권 권아민 연구원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고점(1440원)도 돌파한 1450원의 현재 (환율) 레벨은 오버슈팅이라는 판단을 유지한다"면서도 "기존 제시한 2025년 상반기 평균 환율은 1380원이었는데 (이를) 1400원 초반으로 상향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