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뉴삼성' 이제 시작
사업지원TF를 사업지원실로 격상…그룹 컨트롤타워 재건
HBM 반도체 경쟁력 강화·삼성생명 회계 이슈 정리 과제로
삼성전자가 그룹 콘트롤타워를 재건하고 본격적인 경영 정상화에 돌입한다. 국정농단 사건과 얽히며 지난 2017년 미래전략실(미전실)을 해체한 후, 이재용 회장이 각종 재판에 불려다니는 동안 삼성그룹은 전체를 총괄하는 컨트롤타워의 부재 속에 굵직한 현안 처리에 어려움을 겪어 왔다.
삼성을 총괄하는 그룹 컨트롤타워의 역사는 길다. 현재의 '관리의 삼성'을 만들기 위해 창업주 이병철 선대 회장의 비서실에서 비롯된 그룹 컨트롤타워는 구조조정본부(구조본), 전략기획실, 미래전략실로 이름을 바꿔가며 삼성의 미래를 기획했다.
이학수·김순택·최지성 전 부회장 등 58년간 삼성의 2인자로 불리는 핵심 인물들은 부회장직으로써 컨트롤타워의 장을 맡으며 그룹 전반의 전략 수립에 관여해 왔다. 삼성의 각종 인수합병(M&A)이나 승계 등 그룹의 대소사는 모두 비서실·구조본·전략기획실·미전실을 통했다.
지난 2017년 미전실 해체 후 삼성그룹을 총괄하는 리더십의 부재로 삼성은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재용 회장의 사법 리스크는 그룹 컨트롤타워를 부활시키는 데 부담으로 작용했다. 사실상의 비상경영체계가 약 8년여 동안 지속된 셈이다.
이에 삼성전자는 비상조직으로 운영해 온 '사업지원TF'를 정식 조직인 '사업지원실'로 격상했다. '미니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던 TF를 '실'로 승격시키며 본격적으로 그룹 현안을 다룰 것으로 관측된다. 초대 실장은 이재용 회장의 복심으로 알려진 박학규 사장이다. TF장을 맡았던 정현호 부회장은 회장 보좌역으로 역할이 바뀌며 2선으로 물러났다.
사업지원실의 지원 하에 사법 리스크를 완전히 해소한 이재용 회장의 '뉴삼성'은 보다 본격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전자는 사업지원실 격상이 "조직 안정화 차원"이라며 "사업지원실은 미전실보다 작은 규모로 컨트롤타워 부활과 개편은 무관하다"라는 입장이지만 사업지원실이 그룹 현안을 다뤄야 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18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의 사업지원실은 전략팀·경영진단팀·피플팀·M&A팀 등 4개 팀으로 조직된다. 현재 약 70여명의 직원이 사업지원실 소속으로 알려졌다. 기존 미전실이 전략·기획·인사지원·법무·커뮤니케이션·경영진단·금융일류화지원 등 7개 팀, 240여명으로 구성됐던 것을 고려하면 조직의 규모는 축소됐다.
◆ 사업지원실이 당장 풀어야 할 현안은?
우선 본업 경쟁력 강화가 삼성의 가장 큰 숙제다. D램 등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절대강자였던 삼성전자는 HBM 시대 이후 SK하이닉스에 주도권을 뺏겼다. 이 과정에서 수익성도 악화됐다.
지난 2015년부터 평택캠퍼스에 건설을 추진해 온 6개 생산라인(P1~P6) 구축에도 차질이 생겼다. 지난해 10월 완공 예정이던 P4는 공사중단, P5도 기초공사 이후 사실상 중단 상태다. 2023년 DS부문에서 15조원에 육박하는 적자를 낸 것이 컸다. 파운드리 수주 부진과 D램 공급과잉, 건자재 가격 상승 등이 맞물리면서다.
중단됐던 공사는 곧 재개될 것으로 관측된다. 한미 관세협상이 마무리되고 삼성그룹의 콘트롤타워가 재건되며 삼성전자는 향후 5년간 국내에 총 450조원을 투자할 계획을 밝혔다. 평택의 P5 공사에도 착수한다. 5년간 6만명 규모의 신규 채용에도 나선다. 반도체 슈퍼 사이클이 도래하고 D램 가격이 뛴 것도 호재다. P5 라인은 오는 2028년부터 본격 가동될 예정인데 이를 위한 기반 시설 투자도 병행한다.
이밖에도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한 투자, 다거점 AI 인프라 전략 추진 등 삼성SDS·삼성디스플레이·삼성전기를 비롯한 IT 계열사 간 시너지도 극대화한다.
삼성생명을 중심으로 한 지배구조 개선 작업도 필요하다. 특히 삼성생명은 최근 일탈회계 논란을 겪고 있다. 1980~90년대 고객의 보험금으로 확보한 삼성전자, 삼성화재 등 계열사 지분의 회계 처리 방식을 두고서다. 해당 지분은 삼성그룹 오너 일가의 지배력을 유지하는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는데, 매각시 고객들에게 배당 의무가 발생한다. 삼성생명은 배당 비용을 계약지지분조정이라는 항목으로 계산해 왔는데, 지난 2023년 새로운 국제회계기준(IFRS17)이 도입되며 회계처리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간은 삼성생명이 지분 처리 계획이 없다는 전제하에 일탈회계가 인정됐는데, 삼성전자가 밸류업을 위한 자사주 소각에 나서자 금산분리법에 따라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지분을 매각하며 원칙이 깨졌다. 금융당국과 한국회계기준원은 조만간 연석회의를 열고 삼성생명의 회계처리를 논의할 계획이다.
삼성생명이 보유한 그룹 계열사 지분은 삼성그룹 지배력과 직결된다.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지분 약 8.5%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삼성화재도 약 1.5%를 보유하고 있다. 삼성그룹의 사실상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삼성물산의 삼성전자 지분이 5.05%, 이재용 회장의 직접 지분이 1.65%인 것을 고려하면 삼성생명의 영향력은 막대하다. 이재용 회장은 삼성생명 지분 10.4%와 삼성물산 지분 19.9%로 사실상 삼성을 지배하고 있다.
재계에서는 삼성물산이 삼성에피스홀딩스 지분을 매각하거나 삼성생명이 들고 있는 삼성전자 지분과 스왑(swap)하는 방식으로 삼성전자 지분을 확보하고, 금산분리법을 충족시키는 방안이 꾸준히 언급되고 있다. 다만, 이 경우 지주회사로 강제전환되는 삼성물산이 삼성전자 지분을 30% 이상 보유해야 해 막대한 비용이 든다.
삼성전자 및 금융 계열사가 복잡하게 얽힌 삼성그룹의 지배구조 복잡성을 해소하는 것도 사업지원실의 주요 역할이 될 것으로 전망되는 이유다.
또 미래 먹거리 확보를 위한 M&A도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사업지원실 M&A팀 수장은 '빅딜 전문가'로 불리는 안중현 사장이다. 안중현 사장은 삼성전자의 하만 인수 등 대형 프로젝트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 박학규 사장은 누구?
이같은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 사업지원실장으로 박학규 사장이 낙점됐다. 삼성그룹 콘트롤타워의 수장은 전통적으로 삼성그룹의 2인자가 맡았다. 지난날 회장 비서실을 거쳐 구조조정본부 본부장, 전략기획실장을 지낸 이학수 전 부회장, 이후 미래전략실장 최지정 전 부회장과 차장 장충기 전 사장, 사업지원TF장으로 삼성그룹 비상경영체제를 이끈 정현호 부회장 등이 대표적이다.
박학규 사장 역시 이들과 비슷한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박학규 사장은 미전실의 전신 격인 삼성전자 비서실 재무팀을 거쳐 미전실 경영진단팀장 부사장을 지내다 미전실이 해체되며 퇴사했다. 이후 8개월 만에 삼성SDS 사업총괄 부사장으로 복귀했고, 2년 후 다시 삼성전자로 복귀해 경영지원실장을 역임했다. 비서실 재무팀, 미전실, 사업지원TF를 모두 거친 셈이다.
1964년생으로 청주고,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경영과학 석사학위를 받은 박학규 사장은 삼성전자 입사 후 요직을 두루 거친 재무통이다.
재계에서는 이번 연말 임원인사에서 박학규 사장의 승진 여부에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간 그룹의 콘트롤타워 수장이 대대로 부회장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연말 박학규 사장의 부회장 승진이 유력하지 않냐는 관측에서다.
삼성전자는 최근 전영현 부회장이 용퇴를 결정했고, 정현호 부회장도 일선에서 한 발 물러났다. 박학규 사장이 이끄는 사업지원실 팀장은 사장급으로 전략팀장에 최윤호 사장, 경영지원팀장에 주창훈 부사장, 피플팀장에 문희동 부사장, M&A팀장에 안중현 사장 등이다. 박학규 사장의 부회장 승진은 원활한 조직 관리 및 계열사와의 조정에도 힘을 받게 될 것이란 분석이다.
다만, 삼성그룹이 미전실 해체 이후 부회장급 그룹 컨트롤타워 재건 자체에 대한 부담을 느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과거 국정농단 사태에 연루되며 해체된 만큼, 섣부른 재건 혹은 부활이란 이미지도 함께 떠오를 수 있어서다. 또 각 계열사 CEO의 책임경영 기조와도 맞지 않는다는 우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