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경제학자 조셉 슘페터(J. Schumpeter)는 경제 발전을 설명하면서 ‘창조적 파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가 말하는 창조적 파괴란 기술 혁신을 통해 기존의 낡은 방식을 버리고(파괴) 새로운 제도와 시스템을 도입해 발전(창조)해 나가는 과정을 뜻한다. 특히 그는 기업가에 의해 시도되는 창조적 파괴 행위를 중요시했는데, 이를 기업가 혁신(Innovation)이라 부르며 “경제 발전을 자극하는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슘페터는 그의 저서 “경제발전의 이론”에서 기업의 이윤은 혁신적인 기업가가 창조적 파괴 행위를 통해 이룩한 성과에서 창출되지만, 다른 기업이 모방하면서부터 이윤은 차츰 소멸되고 불황이 시작된다고 했다. 그리고 불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혁신적인 기업가가 출현해 새로운 국면을 이끌어 갈 산업과 기업을 탄생시키게 된다고 설명한다.

불황과 호황의 국면에서 새로운 산업과 간판 기업이 출현하고 퇴장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는 곳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가장 발달한 미국이다. 미국경제가 영국경제를 따라잡기 시작하는 1860년대를 기점으로 미국에서는 총 다섯 번에 걸쳐 미국을 대표하는 간판 기업이 바뀌었다. 첫 번째는 19세기 말 철강왕 카네기로 대표되는 철도와 제철 관련 기업이 미국의 간판 기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다음으로 20세기 초 전기와 화학공업 분야에서 제네럴 일렉트릭(GE)과 같은 혁신 기업들이 등장해 미국 경제를 이끌었다. 세 번째는 1930년대 대공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대량생산체제를 구축한 자동차와 석유기업들이 미국을 넘어서 글로벌 대표 기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1970년대 두 차례에 걸친 오일 쇼크 이후 미국 제조업이 국제경쟁력을 상실하면서 미국을 대표하는 간판 기업들 성격도 변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는 실리콘 벨리에서 출발한 마이크로 소프트와 같은 벤처기업들이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우뚝 섰으며, 2000년대 이후에는 구글, 아마존 등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IT기업들이 미국 산업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위기 때마다 새로운 분야에서 혁신기업이 등장해 간판 기업이 바뀌어 온 미국의 경우와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국가대표 간판 기업이 지난 몇 십년간 바뀌지 않고 있다. 삼성, 현대, LG 등으로 대표되는 대기업 그룹의 위상은 한결 같으며, 이들 그룹이 주력으로 하는 분야도 전자, 반도체, 자동차 등으로 변함이 없다. 이와 같은 구조가 고착화된 데에는 경제개발 초기 단계부터 대기업 중심의 성장 전략을 채택한 정부 정책에서 일차적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비슷한 경제 발전 과정을 거쳐 온 일본과 중국에서는 소프트뱅크나 알리바바, 텐센트와 같이 2000년대 이후 성장한 기업이 현재 간판기업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새로운 간판기업이 나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아쉬운 대목이다. 특히 혁신적인 벤처기업과 스타트업의 역할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4차 산업혁명의 시기에 아직도 대기업을 중심으로 경제가 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다행히 최근 들어 대기업들 사이에서 변신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된다. 현대자동차는 보스턴다이내믹스 지분을 인수해 로보틱스 사업에 뛰어들면서 자동차 제조업체에서 로봇 및 도심항공모빌리티 기업으로 나아가고 있다. LG전자도 최근 전기차 사업 진출을 선언해 ‘LG=전자’라는 오래된 등식을 깨고 있다. 그리고 SK와 한화도 배터리, 수소와 같은 신재생에너지 분야에 투자 규모를 늘려나가는 등 미래 먹거리 사업을 준비하기 위한 대기업의 변신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공교롭게도 현재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대기업들은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면서 조직이 젊어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는 이들에게서 슘페터가 말한 ‘기업가의 혁신’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원호 중소벤처무역협회 해외시장경제연구원 부원장·경제학 박사

 

저작권자 © 중소기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