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가 인기를 누리면 모창(模唱) 가수가 줄을 잇고, 노래가 절창이면 리메이크 가수가 늘어난다. 2021년으로 이어지는 트로트 열풍은 복고 리메이크 바람결이다. 종편 방송에서 지상파로 천이(遷移)된 비슷하면서도 다양한 경연 프로그램 본선에서 150여 곡이 불려 지면 이중 10여곡이 신곡이고 나머지는 다시 불리는 흘러온 노래이다. 그래서 트로트 르네상스라고 하기에는 창작곡이 드물어 아쉬움이 크고, 트로트 열풍이란 말로 추임새를 더한다. 한국대중가요 100년에 걸린 노래는 줄잡아 88만여 곡이고, 음반을 낸 가수는 40만여 명이다. 이 노래들 중에서 국민애창곡으로 흘러온 대표곡이 '용두산 엘레지'다. 이 국민 애창곡은 1964년 최치수가 노랫말을 얽고 고봉산이 스스로 곡을 엮어서 불렀다. 이 노래를 2019년 미스트롯에 송가인이 절창을 했다. 송가인은 '용두산 엘레지' 노래보다 22년 늦게 이 세상에 탄생했다.

용두산아 용두산아/ 너만은 변치말자/ 한 발 올려 맹세하고/ 두 발 디뎌 언약하던/ 한 계단 두 계단/ 일백구십사 계단에/ 사랑심어 다져놓은/ 그 사람은 어디가고/ 나만 홀로 쓸쓸히도/ 그 시절 못 잊어/ 아아~ 못 잊어 운다// 용두산아 용두산아/ 그리운 용두산아/ 세월 따라 변하는 게/ 사람들의 마음이냐/ 둘이서 거닐던/ 일백구십사 계단에/ 즐거웠던 그 시절은/ 그 어디로 가버렸나/ 잘 있거라 나는 간다/ 꽃피던 용두산/ 아아~ 용두산 에레지.(가사 전문)

오래 흘러온 노래는 오래 흘러간다. 복고(復古)와 리메이크 바람에 옛 노래가 걸리면 인기 열기는 고공으로 역주행을 하고, 무대를 관망하던 베테랑 가수들이 무대 위에 다시 불려 나온다. 세상과 통하는 오솔길이거나 징검다리 혹은 강 물결을 따라 바다로 흘러가는 돛단배이기도 한 대중가요 유행가의 매력이다. '용두산 에레지' 노래는 이재호(1919~1960. 예명 무적인)가 작곡한 노래 '울어라 기타줄'(낯 설은 타향 땅에 그날 밤 그 처녀가 웬일인지~)을 녹음할 가수 배정 과정에서 배반당한 고봉산의 울화통이 씨앗이 되어 만들어진 노래이다. 1957년 늦은 봄 날, 고봉산은 용두산 194계단을 단숨에 뛰어올라갔다. ‘어떻게 이런 배신을 할 수가 있어. 그동안 내가 얼마나 공을 들여서 연습했는데, 다른 가수에게 음반취입을 시키다니....’이때 용두산 꼭대기에서 휘갈겨 쓴 노랫말이 '용두산 엘레지'의 가사다.

이 배반 사실(약속한 노래를 다른 가수에게 준)은 당시 지방 순회공연 중이던 고봉산이 라디오방송을 통하여 손인호가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알게 되었던 것이다. ‘분하다 분해, 하지만 어찌할 것인가? 나 자신이 작곡을 못하여 생긴 일인데...’ 그날부터 고봉산은 피아노에 매달려 작곡 공부에 전념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세아레코드 최치수 사장과 협의하여 휘갈겨 두었던 가사를 다듬고 자신이 곡을 붙인다. 그 노래가 '용두산 엘레지', 일명 '추억의 용두산'이다.

이 노래의 모티브 장소 용두산은 부산(釜山)·송현산·우남공원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다시 용두산으로 불린다. 부산은 '동국지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고, 산모양이 가마솥을 닮았다하여 가마솥 부(釜)자를 산(山) 앞에 붙인 고유의 이름이다. 6.25전쟁 후 이승만 대통령은 이곳 이름을 우남공원으로 바꾼다. 그는 서울 우수현 남쪽 오두막에서 어린 시절 공부를 했는데, 우수현 우(雩)자와 남녘 남(南)자를 따서 자신의 호를 지었고, 이 호를 따서 공원이름을 붙였다. 이 이름은 4.19와 5.16정변 후 1966년 용두산으로 다시 환원된다.

이 노래에 서사된 194계단 꼭대기에는 용두산공원이 있다. 1930년경 이곳에는 일본제국주의 신사(神寺)가 있었다. 1970년대 까지 중앙동 부산호텔 근처에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고, 광복동에서는 에스컬레이터로 올라갈 수 있었다. 이곳에서 부산항과 영도(影島, 그림자 섬)를 바라볼 수 있고, 부산타워 아래에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서 있다. 이곳은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 첫 날 왜군들이 조선 땅에 상륙한 곳이다. 용두산은 조선시대에 초량소산·송현산으로 일컬어졌고, 1876년 부산항 개항 후에는 소산·중산 등으로 불렸다. 옛날 부산시청이 있던 자리는 용미산(龍尾山)이라고 불렀다. 식민지시절(1935년 전후) 남포동 방향으로 달리던 전차가 용두산 신사(神社) 앞을 지나갈 때면 전차 안의 승객들은 일어서서 용두산을 향해서 고개를 수그려야 했다고 하니, 분기탱천(憤氣撑天)할 과거사다. 흘러간 유행가를 꼭꼭 씹으면 과거사의 쓴물 단물이 쫄쫄 입안에 베인다.

'용두산 에레지'를 부를 당시 37세 고봉산(본명 김민우)은 1927년 황해도 안악(김구의 고향)에서 출생 하여 악극대원으로 활동하다가 1961년 '아메리칸 마도로스'로 데뷔하여 남석일이란 예명도 사용하였다. 그는 젊은 날 ‘뻥이 세다’고 하여 별명이 고대포였으며, '용두산 엘레지' 히트 후 작곡과 노래를 병행하다가 1990년 심장병으로 향년 67세로 타계했다. 이 노래를 리메이크한 송가인은 1986년 진도 출생, 본명 조은심. 범띠 가시내다. 그녀는 2010년 KBS 전국노래자랑 진도군편 대상, 연말결선에서 2위를 한 후, 2012년 '산바람아 강바람아'로 데뷔한 무명가수였다. 하지만 2020년 불어 닥친 트로트 열풍이 그녀에게 유행가, 트로트 고속도로를 건설해 주었다. 국민애창곡은 시대에 세대를 이어주는 감흥의 징검다리다. ‘용두산아 용두산아 너 만은 변치말자~’처럼, 우리네 인생길이 변함없이 양양하기를 기원해본다.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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