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우리 대중가요 100년사는 시대와 역사의 분기령을 기준으로 끊어지고 이어지는 맥락(脈絡)의 노래가 있다. 해방광복 이전의 대표곡은 <목포의 눈물>, 이후 6.25전쟁발발까지는 <가거라 38선> <신라의 달밤> <울고 넘는 박달재>가 그 시대의 상징 유행가다. 그 중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는 1948년 반야월이 악극단 공연을 다니던 중 충주에서 제천으로 옮겨갈 때에 박달재에서 목격한 남녀 간의 이별장면을 보고 노랫말로 적었다. 천등산 박달재~로 시작되는 가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천등산이 고개인줄로 알고 있으나, 천등산은 고개가 아니다. 충주와 제천을 경계 짖는 산, 이 산에 걸쳐 있는 고개가 다릿재이다. 이 노래는 KBS 가요무대(1985년 11월 4일 첫 방송)시작 20돌이던 200년대까지 가장 많이 신청된 곡이다. 남녀 간의 이별장면은 1절이고, 2절은 박도령과 금봉낭자의 비련 전설을 엮은 것. 이 노래를 부를 당시 박재홍은 22세였다. 이 노래가 대중적으로 히트할 무렵 6.25 전쟁이 발발한다.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넘는 우리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울었오 소리쳤오 이 가슴이 터지도록//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신 임아/ 둘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가소/ 도토리 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 주며/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가사 전문)

이 노래의 모티브 장소 박달재는 제천시 봉양읍 원박리와 백운면 평동리 경계에 있는 고개이며, 박달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또 전설 속의 박달이라는 청년이름을 따서 박달재라고 부른다. 이 재(고개)가 품고 있는 전설은 이렇다.‘옛날 경상도 청년 박달도령이 서울로 과거보러 가는 길에 이 고개에 있는 주막집에 유숙을 하다가 주막집 딸, 금봉낭자와 사랑을 나눈다. 박달은 과거에 급제를 하고 돌아와 백년가약을 맺겠다고 언약하고 한양으로 가고, 금봉낭자는 도토리묵을 싸서 박달도령의 허리춤에 매달아준다. 하지만 한양에 당도한 박달은 과거시험에 낙방을 한다. 이렇게 3년에 걸쳐서 과거에 낙방한 박달이 슬픔에 잠긴 채 돌아와 금봉이 집을 찾았는데, 금봉이는 박달을 기다리다 지쳐 3일 전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에 박달은 식음을 전폐하고 울다가 어느 날 고갯마루를 바라보는데, 그때 꿈에도 그리던 금봉이가 너울너울 춤을 추면서 고개 쪽으로 가는 것을 본다. 그때 힘을 다해 달려가 금봉이를 잡으려고 했으나 손이 미치지 못하였다. 박달은 간신히 고개 위에서 금봉이를 끌어안았으나, 금봉이는 이내 사라지고 박달은 허공으로 몸을 날려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단다. 그 후로 이 고개를 박달재라고 한다. 천등산 박달재는 해발 453m 고개, 고려시대 1217년에 김취려(1172~1234)장군이 거란군 10만 명을 격퇴한 전적지다.

박재홍은 1927년 시흥에서 태어나 은행원으로 근무를 하다가 1947년 오케레코드 신인콩쿨에 입상하여 데뷔를 하였다. 이후 1948년 옥두옥과 같이<눈물의 오리정>을 취입하였고, 1949년 서울레코드를 창설하자 그곳으로 전속하여 <자명고 사랑>, <제물포 아가씨>를 취입하였다. 이후 6.25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쇼 무대에 섰으며, 부산 미도파레코드와 대구 서라벌레코드에 전속으로 있으면서 <경상도 아가씨>, <비 내리는 삼랑진>을 취입하였고, 1960년대 초 오아시스쇼단을 창설하여 단장을 역임했다. 1970년대에는 주로 극장무대에 섰으며, 1989년 3월 지병으로 63세의 일기를 마쳤다.

작곡가 김교성은 1901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20세를 전후하여 이왕직양악대 출신 연주인들에게 클라리넷을 배운다. 이왕직양악대는 일본에서 대한제국으로 건너온 음악자문인원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가 주선하여 1901년 3월 우리나라에 최초로 창설된 군악대(인원은 50명)의 후속 양악대였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과 동시에 군악대는 해체되고, 일본제국주의 조선통감부에 의하여 이왕직양악대로 편성되었던 것. 김교성은 1925년경부터 무성영화 효과음악 연주단원으로 활약하였으며, 연극단의 막간 여흥노래 반주단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36년 왕수복의 <능수버들>을 작곡하여 대중인기를 얻었으며, 1930년대 신인가수선발대회의 심사위원으로 진방남·백난아·박재홍 등을 발굴하였다. 1957년에는 한국대중가요작가협회를 결성하여 초대회장을 역임했고, 1960년 향년 59세로 작고했다.

우리 대중가요 유행가의 전설 같은 반야월은 2012년 3월 9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가요계의 큰 별이 진 것이다. 1917년 마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진해농산학교를 졸업하고, 1939년 김천 전국신인가수 선발대회에 입상하며 가수로 데뷔하였으며, 백년설의 데뷔와 같은 해다. 해방 이후에는 전 국민의 사랑을 받은 <울고 넘는 박달재>, <단장의 미아리 고개>, <소양강 처녀>, <유정천리>, <아빠의 청춘>, <무너진 사랑탑> 등 수 천여 곡을 작사했다. 그는 이름이 많다. 박창오·진방남·반야월·추미림·박남포·허구 등. 1940년 진방남이란 예명으로 활동하면서 <불효자는 웁니다>, <고향만리>, <오동잎 맹세> 등을 불러 히트시켰고, 1945년 광복 이후에는 반야월로 이름을 바꿔 작사가로 명성을 날렸다. <단장의 미아리고개>, <만리포 사랑>, <소양강 처녀>, <삼천포 아가씨> 등 불후의 명곡이 그의 손에서 태어났다. 그는 박시춘·이난영과 함께 가요계의 3대 보물로 불릴 만큼 대중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는 별세 4일 전까지 작품 활동을 한 우리 유행가의 거장이다.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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