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마부작침(摩斧作針)이다. 쇳덩어리를 갈고 갈면 바늘이 된다. 산속에서 하던 공부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쇳덩이를 정성들여 갈고 있던 노인에게 들은 말이다. 노인의 설파(說破)를 들은 청년은 다시 산으로 올라가서 공부에 전념하여 대학자로 한다. 당나라 시인 이백(701~762)의 일화다. 남녀 간의 사랑도 이와 같다. 간절한 공을 들여야 상대방의 마음을 꽤 뚫어 사랑의 오솔길을 털 수가 있다. 박구윤의 <나무꾼>도 이런 노래다. 이 같은 남녀 간의 사랑 작업 곡, 한국대중가요 100년사에 가장 빛나는 구애곡(求愛曲)은 1966년 길옥윤이 패티김에게 전화로 들려준 <4월이 가면>이다. 이 노래로 1927년 영변 출생 길옥윤은 1938년 서울 출생 패티김의 마음의 성을 무너트리고 결혼에 성공했었다. 11살 차이라는 세월 강에 사랑의 다리를 놓았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얼굴/ 잠이 들면은 꿈속의 사랑/ 사월(4월)이 가면 떠나갈 사람/ 오월(5월)이 오면 울어야 할 사람/ 사랑이라면 너무 무정해/ 사랑한다면 가지를 말어/ 날이 갈수록 깊이 정들고/ 헤어보면은 애절도 해라// 사랑이라면 너무 무정해/ 사랑한다면 가지를 말어/ 사월이 가면 떠나야 할 그 사람/ 오월이 오면 울어야 할 사람.(가사 전문)

애절함과 연민의 정을 감성적인 은유와 애절한 직유로 얽었다. 이 노래 속의 4월에 떠나갈 사람은 패티김(1938~ 서울 출생. 김혜자), 5월에 울어야 할 사람은 길옥윤(1927~1995. 영변 출생. 최치정)이다. 1966년 길옥윤 작사 작곡의 이 노래는 패티김의 목청을 타고 세상에 나온다. 길옥윤이 이 노래를 만들어서 전화기를 통하여 패티김에게 들려준다. 당시 길옥윤은 충무로 대한극장 근처 초라한 호텔에 있었고, 패티김은 뉴코리아 호텔에 투숙하고 있었다. 패티김은 이 노래를 듣고 4월에 예약해두었던 미국행 비행기 표를 취소한다. 그해 6월 둘은 약혼식을 하고, 12월 10일 당시 민주공화당 의장이던 김종필(1926~2018. 부여 출생)주례로 결혼을 한다. 워커힐 호텔에서 3천여 명의 하객들 앞에서. 작업 송 <4월이 가면>의 골인 점이었다. 두 사람은 첫날밤을 워커힐 호텔에서 보내고 당시 길옥윤이 활동을 하던 일본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그리고 이듬해 6개월 일정의 신혼여행을 떠난다. 오키나와·타이완·필리핀·베트남·동남아 등지로. 이때 베트남 전쟁터에 파병된 우리 국군장병 위문공연을 자발적으로 하기도 했었다. 이때 주월한국군사령관(맹호부대장) 채명신과 인연을 맺는다. 패티김이 채명신(1926~2013, 황해 곡산 출생)의 영결식장에서 장송곡(내 영혼이 은총 입어)을 부른 인연의 시작이기도 하다.

패티김은 서울 중앙여고를 졸업하고, 21세이던 1958년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부른 가수 이해연의 남편 베니김 추천으로 린다김이란 예명으로 미8군 무대에서 노래를 시작하였다. 이듬해 미국가수 패티패이지의 이름을 본 따, 김혜자에서 패티김으로 예명을 바꾼다. 그녀는 1962년 우리나라 최초로 리사이틀 공연을 하였고, 1971년 디너쇼도 시도한다. 이후 일본·동남아·미국 등 서구로 진출하며, 미국 카네기홀과 호주 오페라하우스 공연을 하는 등 원조 한류이다. 1978년에는 대중가수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패티김 리사이틀, 서울의 연가>를 공연했으며, 1989년에는 한국인 가수로는 처음으로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공연하였다. 그녀는 2012년 생년 74세, 가수생활 54년을 결산하는 <이별>(원곡 제목,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을 전국 16개 지역 순회공연 후 2013년 가수생활을 마감했다.

패티김은 남편 길옥윤(1927~1995) 사이에 정아, 이태리 남편(아바라도 게디니, 1976년 재혼) 사이에 카밀라 게디니가 있다. 또한 패티김을 사랑한 예술가, 가요계의 큰 별 작곡가 박춘석(1930~2010, 서울 출생. 박의병)은 패티김의 남편 길옥윤과 연정의 라이벌(?)이었으며,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저 하늘의 별이 되었다. 패티김은 박춘석의 가사와 곡을 유독 많이 불렀다. 박춘석은 경기고 1학년 때 명동클럽에서 피아노연주자로 데뷔하였다. 1949년 서울대 피아노전공으로 입학하였으나, 1년 만에 중퇴를 하고 1950년 신흥대학(경희대)영문과에 편입해 졸업하였다.

1958년 봄날, 김혜자는 명동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일자리를 찾는 걸음이었다. 학창시절 스튜어디스나 아나운서를 동경했지만 길을 몰랐다.‘너 혜자 아니냐?’작은오빠의 절친 곽준용이었다. 준용은 기타를 들고 집으로 찾아와 혜자의 형제들과 어울려 노래를 부르곤 했었다.‘어머 준용오빠, 저 직장 구하러 다니는 중이예요.’ 준용은 혜자의 대답에 놀란 듯 잠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더니, ‘너 노래 한번 해보지 않을래? 노래 잘 하잖아.’우리 대중가요사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며칠 뒤, 곽준용은 김혜자를 화양흥업 전무 베니김 집으로 데려갔다. 당시 곽준용은 화양흥업 소속 기타리스트였다. 화양흥업은 국내 최초의 기획사로 미8군 무대에 가수·연주자·무용수·사회자 등을 공급하고 있었으며, 베니김은 기획자였다. 서울대 치대 출신 베니김은 피아노와 트럼펫연주자로서 직접 가수를 선발했다. 당시 베니김은 미8군 무대에서도 인기정상을 누리고 있었다. 1956년 흑백TV방송이 시작(12월 1일)되기 전, 국내에서 연예인이 설 자리는 미8군무대가 유일했다. 마치 약속을 한 듯 두 사람이 들어서자 베니김은 피아노 앞에 앉아 뚜껑을 열었다.

‘김혜자라고 했지? 그래 무슨 노래를 부를 줄 아니?’표정은 엄숙하고 진지했으나 말투는 부드러웠다. 김혜자는 <You don`t know me>와 <Memories are made of this> 두 곡을 잇달아 불렀다.‘굉장히 소질이 있군.’베니김의 혼잣말이 잔뜩 긴장한 채 노래를 부른 김혜자의 떨리는 가슴을 얼마간 진정시켜주었다.‘가수가 되고 싶니? 예!’김혜자는 큰소리로 대답했다.‘그럼 내일부터 우리 집에 와서 레슨을 받아라.’베니김은 철저하게 미8군 무대를 겨냥하여 노래와 안무를 지도했다. 이때 주로 연습한 노래는 프랭크 시나트라, 댄서 겸 가수 도리스 데이, 패티 페이지 등 미국의 정상급 가수들이 부른 히트곡이었다. 그러면서 베니쇼가 펼쳐지는 미8군무대로 데려가 선배가수들의 쇼를 보여주었다. 철저하게 기획된 견습이었다. 김혜자는 독학으로 영어공부도 열심히 했다. 눈코 뜰 새 없는 사이 한 달이 지났다. 연습을 마치고 귀가하려는 김혜자에게 베니김이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이게 뭐예요? 네 월급이야. 한 달이 지났잖아.’레슨비를 걱정하고 있던 김혜자에게 오히려 월급을 주었다. 연습과정도 일로 치는 서양식 합리성이었다. 집에 와 펼쳐보니 3만 환이 들어 있었다. 당시 서울의 대학교 1년 등록금이 6만 환쯤 하던 시절이었다. 연습생으로 정확하게 3개월이 지나자 베니김은 김혜자를 무대에 세웠다. 아내 이해연과 듀엣으로 패티 페이지의 팝송 두 곡을 부르게 한 것이다. 그만큼 김혜자는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고, 베니김의 조련에 빨리 적응했다. 김혜자는 이해연과 똑같이 까만색 미니스커트에 역시 까만색 민소매 재킷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객석에서 난리가 났다. 20대의 혈기 발랄한 미군들, 사석에서는 장성 앞에서도 테이블 위에 다리를 걸친 채 편하게 대하는 자유분방한 청년들이었다. 그들의 눈에 신장 168㎝에 콜라병 몸매인 21세의 김혜자, 그녀의 인기는 무대에 서는 첫 순간 이미 하늘을 찔렀다. 패티김의 첫 남편 길옥윤은 국민형님 송해(황해 재령 출생)와 동갑내기다. 2021년 95세.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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