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부모님의 은혜를 되새김하는 절기다. 어버이란 말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예로부터 효자 가슴속에 더 깊은 한이 남는다고 했다. 수욕정이풍부지(樹欲靜而風不止), 자욕양이친부대(子欲養而親不待)라는 한시(漢詩)가 새삼스럽게 새겨지는 오월 가정의 달이다. 산자락의 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아 흔들린다. 효성스러운 자식들이 정성스럽게 부모를 봉양하고자 하나 세월 따라 노쇠해가는 나날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우리 대중가요 100년사에 가장 절절한 효도노래는 단연코 <불효자는 웁니다>이다. 가수 진방남의 데뷔곡이기도한 이 절창은 눈물겨운 사연이 담겨 있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30년 차이던 1940년 우리나라는 녹음시설이 없었다. 그래서 음반 취입을 위해 일본 오사카로 갔었다. 태평레코드사 전속으로 신카나리아 등과 같은 일행으로. 그곳에 도착하여 스튜디오에 들어서려는 순간, ‘어머님별세부고’를 받았다. 진방남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심정으로 가슴을 쥐어뜯으며 노래를 불렀단다. 불러 봐도 울어 봐도 못 오실 어머니여~.

불러 봐도 울어 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 원통해 불러보고/ 땅을 치며 통곡해요/ 다시 못 올 어머니여/ 불초한 이 자식은/ 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 손발이 터지도록/ 피땀을 흘리시며/ 못 믿을 이 자식의/ 금의환향 바라시고/ 고생하신 어머니여/ 드디어 이 세상을/ 눈물로 가셨나요/ 그리운 어머니// 북망산 가시는 길/ 그리도 급하셨오/ 이국에 우는 자식/ 왜 몰라라 가셨나요/ 그리워라 어머님을/ 끝끝내 못 뵈옵고/ 산소에 업푸러져/ 한 없이 웁니다.(가사 전문)

이 곡은 가사도 애절하지만, 1~2절 사이 중간대사가 더 처절하다. ‘세월은 유수와 같다고 했습니다만/ 아무런 기약도 없이 부모님 곁을 떠났던/ 그 가슴 아픈 추억이/ 어제인 것처럼 눈에 선 합니다. 그 순간.../ 그것이 정말/ 30년 전 인가요/ 50년 전 인가요/ 북망산 가시는 길/ 그리도 급하셔서/ 이국에 우는 자식/ 내 몰라 하고 가셨나요/ 그리워라 어머님을/ 끝끝내 못 뵈옵고/ 산소에 엎푸러져/ 한없이 웁니다.’식민지 시절 우리네 아버지의 아버지들의 서글픈 서정이 울컥거린다. 북간도로, 만주로, 상해로, 비단구두 사 가지고 오겠다는 약속을 혈육에게 남기고 떠났다가 귀국해보니, 부모님은 이미 저 세상으로 가시고 없었다. 이 노래를 부른 그 풍상세월(風霜歲月)을 살아 낸 선열들을 연상하면 지금도 눈앞이 흐려진다. 어찌 이 절창이 진방남만의 노래이겠는가. 우리 민족의 효도와 망향의 통곡(痛哭)이다.

2절 노래 속의 북망산(北邙山)은 중국 허난성 뤄양시 북쪽에 있는 작은 산이다. 뤄양은 주나라(BC 1046~256) 성왕이 이곳에 왕성을 쌓은 이래 후한을 비롯한 서진·북위·후당 등의 도읍지로 번창하였던 곳. 당시 귀인·명사들이 많이 살았으며, 이들이 죽은 뒤 대개 북망산에 묻혔다. 그래서 한나라 이후 제왕과 귀인·명사들 무덤이 많다. 이 같은 연유로 북망산이라고 하면 무덤이 많은 곳,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 대명사가 되었다. 우리나라에도 북망산이라는 지명이 있다. 서울 강서구 오곡동, 공동묘지가 있던 산이다. 인천 주안동과 문학동 사이에 승학산이 있는데, 이 또한 북망산으로 불린다. 북한 양강도에도 있다. 백두산과 압로록강변 해산시에 있는 북묘산(北墓山)인데, 북망산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공동묘지가 있단다.

중국 공자(BC551~479)가 유랑하다가 하루는 몹시 울며 슬퍼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자신이 우는 까닭을 이렇게 말했다. ‘저는 세 가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첫째는 젊었을 때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집에 와보니 부모님이 이미 세상을 떠나신 것이요, 둘째는 섬기고 있던 군주가 사치를 좋아하고 충언을 듣지 않아 그에게서 도망쳐온 것이요, 셋째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교제를 하던 친구와의 사귐을 끊은 것입니다. 무릇 나무는 조용히 있고자 하나 바람 잘 날이 없고, 자식이 부모를 모시고자 하나 부모는 이미 안 계신 것입니다. 그럴 생각으로 찾아가도 뵈올 수 없는 것이 부모인 것입니다.’이 말을 마치고 그는 마른 나무에 기대어 죽고 말았다. 그러므로 효도를 다하지 못한 채 부모를 잃은 자식의 슬픔을 가리키는 말로 부모가 살아계실 때 효도를 다하라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 생겨났다. 《한시외전》(韓詩外傳)》9권에 나온다. 풍수지탄(風樹之嘆)·풍목지비(風木之悲)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

<불효자는 웁니다>는 어버이날 효도 곡으로 많이 불린다. 1913년 5월 미국의 한 여성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하여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카네이션 한 송이씩을 나누어 주었다. 이후에 그 지역을 중심으로 이러한 관행이 번지기 시작했고, 우리나라는 1956년에 ‘어머니날’로 정했다가 1973년 ‘어버이날’로 정하였다. 양력 5월 8일이다.

<불효자는 웁니다> 노래를 부를 당시 23세였던 진방남은 1917년 진해 출생 본명 박창오다. 진해농산학교를 졸업하고 양복점 재단사보조로 일하면서 가수의 꿈을 키웠으며, 1939년 김천콩쿨대회에서 ‘불탄 잔디 속잎 나는/ 그리운 봄 돌아왔네/ 먼 산 먼 동 안개 속에/ 도화꽃도 피었는데~’라는 노래 <춘몽>(春夢)을 불러 입상하며 데뷔하였다. 그는 이름이 많다. 박창오·진방남·반야월·추미림·박남포·허구 등등. 데뷔한 이듬해 진방남이란 예명으로 <불효자는 웁니다>·<고향만리>·<오동잎 맹세> 등을 히트시켰고, 1945년 광복 이후에는 반야월로 이름을 바꿔 작사가로 명성을 날렸다. 그는 박시춘, 이난영과 함께 한국가요계의 3대 보물로 불렸다. 반야월(半夜月)이라는 예명은 반달에서 보름달로 차오르기 위하여 채울 것이 많다는 의미다. 진방남은 2012년 3월 26일 95세를 일기로 타계하였으며, 작고 5일 전까지 창작을 하다가 떠나간 한국대중가요의 전설, 일면 한국대중가요계의 작사·작곡·가수를 아우르는 진정한 선구자(先驅者)다. 철리 든 후 효도를 하려고 하지 말고, 오늘 부모님의 근황을 살피보시라. 효자효녀들이시여~.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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