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유행가>는 2003년 58세의 송대관이 자기 자신의 인생살이를 담아서 부른 곡이다. 노랫말을 그의 아내 이정심이 작사를 하였으니, 온전한 송대관의 인생곡이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무명시절 <세월이 약이겠지요>, <해뜰날>과 같은 노래가 바로 가수 자기 자신을 노래한 것들인데, 이 곡 또한 그렇다. 해방둥이인 그의 인생살이가 바로 우리의 현대사와 같은 수레바퀴 위에 올라앉아 있는 것이 아닐까.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부부(夫婦)는 비포장도로이건, 고속도로이건 같은 수레바퀴 위에 올라앉은 나그네다. 이들 부부의 주관적인 경험이 대중들과의 객관적인 공감대를 이루면서 유행가 노래 가락은 허공중을 맴돈다. 시인들이 얽은 영혼의 시는 원고지 위에 앉아 있지 않고 대중들의 가슴팍에 매달리고, 대중가요 작품자들이 얽은 노랫말은 오선지 위에 드러누워 있지 않고 대중들이 흥얼거리는 목청을 타고 허공중에서 허공중으로 전파된다. 인기의 향기와 메아리다.

유행가 유행가 신나는 노래/ 나도 한번 불러본다/ 쿵쿵따리 쿵쿵따 짜리자짜/ 유행가 노래 가사는/ 우리가 사는 세상 이야기/ 오늘 하루 힘들어도/ 내일이 있으니 행복하구나// 유행가 유행가 신나는 노래/ 나도 한번 불러본다/ 유행가 유행가 서글픈 노래/ 가슴치며 불러본다/ 유행가 노래 가사는/ 사랑과 이별 눈물이구나/ 그 시절 그 노래/ 가슴에 와 닿는 당신의 노래.(가사 전문)

노래는 그때그때의 사회상을 현재 상태로 담아서 보전한다. 그 시절 그 노래로 흘러온 우리 대중가요100년사가 1921년 <희망가>로부터 2021년까지 불리어진 88만여 곡이다. 가수도 40만여 명이다. 유교의 경전 《예기》에는 노래는 세상과 통한다고 하면서, 치세(治世)의 노래는 편안하고 즐겁고(樂), 난세(亂世)의 노래는 화를 품은 분(噴)에 차 있고, 망국(亡國)의 노래는 슬픔과 시름의 한탄(恨嘆, 한과 탄식)에 잠겨 있다고 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노래에는 세상의 기쁨과 슬픔이 그대로 담긴다. 송대관이 유행가 노래가사는 우리가 사는 세상 이야기라고 노래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 곡은 젊은 층이 즐겨 부르는 인기곡이다. 특히 이 노래 중 쿵쿵따리 쿵쿵따 부분의 때밀이 춤 안무는 가수 박진영(1996년 JYP엔터테인먼트 설립)이 송대관에게 전수한 것이란다. 사실 박진영이 때밀이 춤을 정통으로 전수한 것은 아니고, 박진영이 즉석에서 안무해 준 것을 송대관 방식으로 추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유행가> 노래의 주인공 송대관은 1945년 정읍에서 태어나 전주 영생고를 거쳐 1967년 20세에 <인정 많은 아저씨>로 데뷔를 하지만 오랜 기간 무명의 세월을 보낸다. 그러던 그가 1973년 자신의 처지를 노래한 <세월이 약이겠지요>를 부르고 나서 방송에 종종 출연을 하였으며, 1975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이 작사하고 신대성(본명 최시걸, 1949~2010. 안동 출생)이 작곡한 <해뜰날>로 인기정상 가도를 달린다. 노랫말처럼 그의 가수 인생에 쨍하고 해가 뜬 것이다. 하지만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어 1970년대 말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이후 8년간 미국에서 어렵게 생활하다가 1988년에 귀국한 후 1998년에 이 노래 <유행가>를 부른다. 그는 2008년 응모자 200명을 직접 인터뷰를 하여 후 김양(본명 김대진)을 자신의 후계자로 스카웃하여 <우지마라>를 히트시켰으며, 남진의 뒤를 이어 한국가수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시인 송수권은, 노래는 세상에 거는 주문(呪文)이라고 했다. 보들레르는, 나를 절망에서 건져준 것은 음악이라고 말했다. 노래는 슬플 때 위안을 주고 기쁠 때는 기쁨을 보태준다. 흥겨울 때는 흥을 더해주고 우울할 때는 용기를 준다. 삶이 힘들 때는 희망을 선사하기도 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우리들의 희망과 꿈에 대하여 노래 이상으로 효과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없다고 하며 노래의 매력을 예찬했다. 베토벤도, 음악은 어떠한 지혜, 어떠한 철학보다도 높은 계시라고 했다. 완료된 인격자라고도 할 수 있을 우리 국민들의 영적인 멘토, 김수환추기경(1922~2009)도 대중들과 소통할 때는 유행가를 불렀다. 영혼은 마음과 현실이 응결 지어진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는, 혼융합성체(混融合聖體)다. 이 성체에 가장 큰 위안을 주는 것이 바로 대중가요다. 대중가요는 흥얼거릴수록 충전되는 재생에너지다.

유행가(流行歌)란 무엇인가. 대중가요 또는 성인가요라고 통칭하며, 대중매체와 상업적 공연을 통해 대중에게 전달되면서 서민 대중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정의와 범주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생성 시기를 1876년 조일강화도조약 이후 1894년 갑오경장시기의 <새야새야 파랑새야>를 대중들이 부른 대중가요 형태인 창가의 효시로 보는 견해와, 1921년의 <희망가>(이 풍진 세상)이라는 설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공중전파를 통하여 대중들에게 노래가 전달된 시기는 1927년 2월 16일 경성방송국(호출부호 JODK) 개국부터다. 이후 라디오 공중파가 전국으로 방영되면서 폐쇄적인 공간 중심의 악극·공연·유랑극·창극·가설무대의 막간(幕間)에서 불리던 막간가수들의 노래가 제한된 시간과 공간지대에서 전국적으로 공유되면서 세칭 가사와 멜로디의 유행(流行)을 감성적으로 트렌드화 하였다. 대중가수가 탄생된 모티브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유행가 가수 1호는 <봄노래>(봄노래 부르자)를 부른 채규엽(1906~1949)이다. 이러한 유행가는 유행창가·유행소곡·신민요 등으로 불리면서 대중들의 시대이념과 민중들의 감성적인 반응 표출로 볼 수 있는 인기로 이어진다. 이러한 초창기의 노래들이 바로 <사의 찬미>, <낙화유수>, <황성 옛터>, <봄노래 부르자>, <타향살이>, <목포의 눈물>, <짝사랑> 등으로 이어지면서 대중들의 가슴속에 감흥의 비포장도로를 닦는다.

따라서 유행가는 대중매체와 상업적 공연으로 전달되는 노래 중, 동요나 가곡 같은 본격 음악계의 노래나 전통민요·잡가·판소리·창 등 국악 분야의 노래와는 구별되는 노래로 지칭할 수 있다. 결국 유행가라는 용어는 일본제국주의 강제점령기 중 일본이 1930년대 초부터 1940년대 전반기 기간 중,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군국시대로 시대 상황을 몰고 가면서 군국가요, 국민가요(기미가요), 애국가요를 강요 강압한 데 대한 저항과 우리 민족 고유의 노래 명칭 의미를 함의한 노래로 통칭하는 대명사로 치면 좋으리라.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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