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유행가연구원 원장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유행가연구원 원장

폐쇄와 격리로 점철되는 보건의료 환경의 소실점이 아련하게 보인다. 방역당국의 선도와 국민들의 능동적인 참여 결실이다. 이러한 과정에 한 몫을 챙긴 아이템이 대형 노래방과 다를 바가 없는 스튜디오에서 녹화·생방송으로 진행된 각종 트로트 경연대회와 스핀오프(spin-off, 유사하게 파생된) 프로그램들이다. 노래는 세상과 통한다고 했던, 공자의 설파가 2500여 년의 세월 뒤에 증명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영상 주파수는 전염성 질병인자를 달고 다니지 않기 때문에, 안방에서 1열 횡대로 앉아서 감흥의 열기를 더하는 시청률은 더 올라가는 것이 이상할 일도 아니지 않는가. 하지만 재미와 흥미에 매달리는 의미를 찾을 길이 없어 아쉽다. 이런 면에서 지난날 부산의 국제시장 남포동 거리 사람들 삶의 단면을 얽은 노래, <항구의 사랑>이 품은 시대서정과 사연을 펼친다.

둘이서 걸어가는 남포동의 밤거리/ 지금은 떠나야할 슬픔의 이 한 밤/ 울어 봐도 소용없고/ 붙잡아도 살지 못할 항구의 사랑/ 영희야 잘 있거라 영희야 잘 있거라.

 

곁에다가 여인네를 세워 두고 말을 건네는 듯한, ‘영희야 울지마라, 응?/ 울어 봐도 소용없고 붙잡은들 무엇 하니/ 어차피 떠나가는 마도로스가 아니냐, 응?/ 영희야 잘 있거라.’중간대사는 유랑객 뜨내기 마도로스의 사랑을 리얼리티 멘트링으로 2절 노래를 불러낸다.

 

네온 불 반짝이는 부산극장 간판에/ 옛 꿈이 아롱대는 흘러간 로멘스/ 그리워도 소용없고/ 정들어도 맺지 못할 항구의 사랑/ 영희야 잘 있거라 영희야 잘 있거라.(가사 전문)

<항구의 사랑> 속의 항구는 부산이고, 울어 봐도 붙잡아도 소용없는 사랑의 배경지는 남포동 국제시장·자갈치시장 골목이다. 이 노래의 매력은 구체적인 지명과 건물의 위치 및 광경이 그림처럼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 노랫말의 서정적 분위기에 흠뻑 빠져서 일부러 부산으로 가서 남포동의 밤거리를 하릴없이 쏘다니는 사람도 한 둘이 아니다. 그리고 부산극장이 있던 자리도 일부러 찾아가 네온 불이 지금도 깜빡이고 있는지 확인해보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1950년대의 정서는 이미 안개처럼 사라지고 없다.

이 노래는 과거 지역 단위의 노래자랑에서 출연자들이 가장 많이 선택해 부르던 곡이었다. <비 나리는 호남선>, <추억의 소야곡>, <해운대 엘레지> 등이 바로 그런 노래였다. 이 노래를 음반으로 제작할 당시인 1958년경에는 같은 음반 1장의 A·B면을 각각 다른 가수의 노래를 취입하기도 하였다. 여러 가수의 노래를 모아서 출반하는 컴필레이션 방식이다. 제작비도 그렇고, 노래나 가수의 사정도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음반판매량을 고려한 상업적 트렌드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노래도 A면에는 안정애의 <대전 부르스>를 담았고, 이 곡은 B면에 실었다. 하지만, 작사가 작곡가는 최치수와 김부해로 두 곡 다 같은 작가였다. 이것 또한 시대 역사적 산물이다.

윤일로의 본명은 윤승경. <항구의 사랑>의 사랑을 부를 당시 21세였다. 그는 1935년 평양에서 출생하여 1956년 킹스타레코드 전속가수로 활동을 시작하여 <너 없는 세상이란>, <기타부기>, <항구의 사랑>, <기분파 인생>, <추억의 영도다리>, <메리깽 부두>, <월남의 달밤> 등을 히트시켰다. 특히 그가 부른 부산노래 <추억의 영도다리> 때문에 그를 부산 태생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그는 <월남의 달밤>으로 명실 공히 스타덤에 올랐고, 그가 작곡한 <노총각 맘보>는 송해(송복희, 1927~) 선생이 불렀다. 중절모 신사로서 짙고 굵은 중저음이 윤일로의 매력이었다. 그는 1964년 김부해가 작곡한 <메리깽 부두>를 부른다. 항구가 낳은, 항구의 서정을 적시한 노래였다. ‘항구마다 사랑이고 부두마다 이별인가/ 새파란 그라스에 눈물도 많다만은/ 하룻밤 왔다가는 메리깽 상선에도/ 순정이 있더냐 애수가 있더냐/ 배 떠난 파도 위에 꽃다발이 흩어 졌네// 등대마다 맹서 있고 뱃길 마다 이별인가/ 나이트 캬바레엔 슬픔도 많다만은/ 항구에 피고 지는 메리깽 사랑에도/ 정열이 있더냐 진정이 있더냐/ 메리깽 메리켕 부두가에 테프가 끊어졌네.’그야말로 항구의 사랑의 적시(摘示)다. 노랫말 중에 메리깽은 아메리칸을 메리칸(메리깡)으로 얽은 노랫말일 테다.

윤일로는 음악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가진 엔터테이너였다. 예명 일로(一路)는, ‘한길로 살으라’는 말인데, 싱어송라이터·코미디언·성대묘사·MC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로맨티시스트로 통했다. 대중문화예술이라는 큰 길 속에 작은 오솔길들을 스스로 닦은 걸출한 예술가였다. 1964년 대한뉴스 화면(대한뉘우스 456호)에 소개된 현인과 함께 부르는 <신라의 달밤> 영상이 화제가 되어 ‘몸은 현인, 마음은 윤일로’라는 유행어도 생겨났었다. 그는 해군 27기생으로 군악대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하였으며, 진해에서 근무할 당시 부산지역 콩쿠르에 참가하면서 심사위원 백영호(1920~2003)를 만났고, 해군본부 전속 후에 손석우(1920~2019)와 나화랑(1921~1983)을 만난다. 나화랑은 그가 군 생활을 할 당시 전역을 하면 찾아오라는 전갈을 남겼었다.

베트남전쟁 당시인 1966년 정부에서 종군연예인단(단장 박시춘)을 편성하여 위문공연을 실시하였으며, 윤일로는 1967·1969·1971년에 걸쳐 세 번이나 다녀온다. 이때 그는 백금녀(본명 김정분, 1931~1995)와 같이 코미디를 겸한 MC로 활약을 하였다. 매니저 겸 비서였던 부인 박수전(본명 박순자)은 KBS남산방송국에서 만난 연인이며, 1960년대 윤일로가 만들어준 <사랑의 물새 한 쌍>을 부른 가수였다. 예명 수전(首田)은 대전에서 가장 빼어난 가수라는 의미다.

<항구의 사랑> 작사가 최치수는 열차 승무원 출신이다. 그는 신신레코드 영업부장이 되기 전 14년 넘게 열차 승무원으로 일했다. 철길 레일도 검사도 했다. 최치수가 노랫말을 지어 안정애가 부른 <대전부르스>도 그의 직업이력과 관련이 있다. 1918년 양주 장흥 출생 김부해는 한영중학교 재학 중 일본인 기무라에게 풍금을 배웠으며, 클라리넷을 독학한다. 이후 경성전매청(연초공장) 취주대로 입단하여 악대장으로 활동하다가 가극단 꽃에서 색소폰 연주를 하였다. 예명은 김방아 또는 라희. 앨토색소폰을 목에 걸고 남대문 악극단과 미군장교클럽무대에 섰으며, 신세기레코드 문예부장을 역임한 그는 2004년 7월 향연 86세로 영원으로 나라로 드셨다.

항구는 상봉보다는 이별의 애환을 더 품는다. 1958년 최치수가 부산항 부둣가, 마도로스와 아가씨의 이별서정을 엮은 노래가 <항구의 사랑>이다. 이 곡은 훗날 부산10대 명곡으로 자리매김 된다. <울며 헤진 부산항>,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 <경상도 아가씨>, <부산행진곡>, <해운대 엘리지>, <잘 있거라 부산항>, <아메리칸 마도로스>, <용두산 엘리지>와 함께. 하루 빨리 코로나 환경이 극복되면, 부산으로 달려가고 싶다.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유행가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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