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사랑하는 연인 간의 키스는 영혼의 결합이고, 영감의 공유행위이다. 이는 나의 입술을 타인의 손등·뺨·목·입술 등에 접촉함으로써 친밀도·존경심·애정 등을 표현하는 동서양의 보편적 행위양식이다. 키스에는 의례적인 것과 성애(性愛)로서의 키스가 있다. 이 기원은 그릇이 없던 시대에 어머니가 아기에게 입으로 물을 먹여준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여러 풍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유럽의 영주(領主)는 신하에게 표창할 때에 입술 위에 키스를 하였고, 신하는 영주의 부재중에 충성을 표시하기 위하여 영주 저택 대문의 빗장에 키스를 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이러한 키스를 모티브로 한 노래는 우리대중가요 100년사에 1960년에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현인이 부른 <베사메 무초>가 첫 단추다. 이 곡은 스페인에서 탄생하여 미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온 노래다. 고요한 그날 밤, 리라꽃(라일락) 지던 밤의 달콤한 사랑의 기억을 품은 곡조.

베사메 베사메무쵸/ 고요한 그날 밤 리라꽃 지던 밤에/ 베사메 베사메무쵸/ 리라꽃 향기를 나에게 전해다오/ 베사메무쵸야 리라꽃 같은 귀여운 아가씨/ 베사메무쵸야 그대는 외로운 산타마리아// 베사메 베사메무쵸/ 고요한 그날 밤 리라꽃 지던 밤에/ 베사메 베사메무쵸/ 리라꽃 향기를 나에게 전해다오/ 베사메무쵸야 리라꽃 같은 귀여운 아가씨/ 베사메무쵸야 그대는 외로운 산타마리아// 베사메 베사메무쵸/ 고요한 그날 밤 리라꽃 지던 밤에/ 베사메 베사메무쵸/ 리라꽃 향기를 나에게 전해다오.(가사 전문)

이 노래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 군대에 입대하면서 이별하는 연인들이 인기를 상승시켜준 곡이다. 오리지널은 스페인의 엔리크 그라나도스(Enrique Granados, 1867~1916)가 같은 나라 출신 선배 화가 고야(1746~1828)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서 지은 곡조 <Besame mucho>다. 이후 1941년 멕시코 하리스코에서 태어난 여류작가 콘수엘로 바라스케스(Consuelo Velasquez, 1920~2005)가 ‘볼레로’라는 편곡을 만든다. 이를 1943년 서니 스카일러(Sunny Skyler)가 영어가사를 붙여 <kiss me much>로 발표하면서 미국에 알려졌다. ‘베사메 무초, 언제든 당신에게 입맞춤 할 때마다 아주 멋진 음악이 들리지요, 좀 더 입맞춤을 하며 나를 꼭 안아주세요. 그리고 그대는 영원히 나의 것 이라고 말해주세요.’라는 사랑의 감흥을 직설적으로 얽은 노래. 원곡 노래가 탄생한 시기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터라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나야 했던 병사들과 남겨진 연인들의 애틋한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인이 31세이던 1949년 <남국의 처녀>로 발표했다가, 42세이던 1960년에 <베사메 무초>로 리메이크하였으며, 노태우 대통령의 애창곡이었다.

리라꽃은 불어로 라일락이며 우리나라 수수꽃다리다. 1947년 미 군정청 직원 엘윈 M. 미더가 북한산에서 털회개나무 씨앗 12개를 반출해가서 이를 개량하여 미스김라일락으로 등록한 것이란다. 미스김은 그가 한국에 근무할 당시 같은 사무실 타자수 여직원 김씨를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란다. 이 종(種)의 라일락은 세계라일락시장 30%를 점유하고 있다. 이 꽃을 다시 수입을 해 오면서 로열티를 지불하고 있으니, 진화론자 다원이 웃을 일이다. 라일락은 세계적으로 30여 종이 있는데, 북한지방에서는 수수꽃다리 남한에서는 털회개나무로 통칭하며, 인제 점봉산과 설악산 중청대피소에서 대청봉에 이르는 길섶에 군락지가 있다. 중국에서는 정향나무라고 한다. 정향(丁香)은 이 꽃봉오리를 말린 것, 배알이·구토·설사 등에 약재로 사용하며, 계설향(鷄舌香)이라고 한다. 꽃말은 젊은 날의 초상, 아름다운 언약이다. 톨스토이의 <부활>에서 청년귀족 네푸류토푸가 하녀 카추샤를 유혹하려고 라일락을 들고 가며, 미국의 롱차일랜드 농가에서 출생한 시인 휘트먼도 노동자의 삶을 노래하면서 이 꽃을 등장시킨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라일락 꽃술을 만들기도 하고, 심술궂은 연인들은 잎이나 꽃을 씹게 한다. 쓴맛의 선물이다.

우리 대중가요사에 키스를 모티브로 한 노래는 많다. 문화의 서세동진(西勢東進)의 영향이다. 1960년 윤일로의 <이별의 키스>, 후랑크백의 <키스 미 굳나잇>, 1961년 김성옥의 <처음키스>, 1963년 아리랑씨스터즈의 <편지로 보내는 키스>, 1964년 아리랑브라더스의 <마지막 키스>, 박상식의 <굿바이>(굳빠이) 키스, 1966년 유주용의 <빨리 키스해주세요>, 1971년 트윈플리오의 <키스로 봉한 편지>, 조영애의 <달콤한 키스>, 1990년 임주리의 1990 <눈물의 공항 키스>, 1992년 김동아의 <키스 바위>, 2000년 핑클의 <첫키스>까지. 노래 제목도 모티브도 다양하다. 아리랑시스터즈의 노랫말을 펼쳐보자. ‘사랑의 입술을 편지에 찍어/ 내 마음 알려주리/ 한여름 해변 가에서 약속한 사랑이였었지요/ 밝은 햇빛처럼 따스한 그대/ 언제까지라도 나는 기다리는 이 심정/ 이별은 정말 싫어해요/ 그 모습 그리며/ 어데선가 들리는 부드러운 목소리/ 허지만 그대는 없네/ 사랑의 입술을 편지에 찍어/ 내 순정 알리리/ 굿바이 라고는 말하지 마세요/ 정말싫어/’노랫말에 수줍음이 매달려 있다. 60여 년의 세월이 흐른 21세기의 서정으로 되짚어 보시라.

<베사메 무초> 원곡 가수 현인(본명 현동주)은 미국 군정 3년이 끝나는 시점에 대중가수로 등록한 해방광복 이후의 제1호 직업가수다. 제2호는 남인수·백년설·한복남 등으로 이어지지만 순위의 의미는 유별나지 않다. 현동주는 대중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인생진로를 바꾼다. 아버지의 바램은 육군사관학교를 진학하는 직업군인, 본인의 꿈은 성악교수, 대중들의 기대는 대중가수였다. 1919년 부산(구포)에서 출생하여 우에노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제국주의 강제징용을 피해 상하이로 건너가 신태양악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귀국 후 현인악단을 조직하여 연주하였고, 여기서 작곡가 박시춘(본명 박순동)을 만난다. 그는 1947년 <신라의 달밤>을 불러 앙코르를 9회나 받으면서 데뷔한 이후, <비 내리는 고모령> 등을 부르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으며, <베사메무초>, <꿈속의 사랑> 등을 불러 번안곡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현인의 창법은 성악을 기반으로 한 특유의 떨림이었다. 또한 번안곡 등은 세계적인 추세와 함께,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한국전쟁 전후에는 <전선야곡>, <굳세어라 금순아> 등을 불러 시대 분위기에 따른 인기를 끌었고, 지병인 당뇨병을 앓다가 2002년 4월 13일 향년 82세로 작고하였다. 예술가는 예술품을 남기고 영원한 별이 된다.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유행가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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