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오래 흘러온 노래를 최신 가수가 부르면 감흥의 온도계는 더 빨리 더 높이 올라간다. 21세기 불어닥친 트로트 열풍이 식지 않고, 수많은 스핀오프(spin-off) 프로그램으로 파생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음이다. 서울 마포구 토정로 312번지, 옛 용강동에 가면 설렁탕집 마포옥(麻浦屋) 이 있다.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집이다. 1949년에 개업을 한 이 집에서 한국대중가요 100년사에서 서울을 대표할 만한 노래가 탄생했다. 1967년 은방울자매의 목청을 통하여 세상에 나온 <마포종점>이다. 대중가요 속에는 역사의 궤적이 씨줄 날줄로 엮여있다.

이 곡은 1960년대 마포구 도화동에 살고 있던 정두수가 노랫말을 지었고, 마포 설렁탕집 단골이던 박춘석이 가락을 엮었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은방울자매. 큰 방울은 박애경, 작은 방울은 김향미였다. 강 건너 영등포에 불빛만 아련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린들 무엇하나. 여기 강 건너 영등포는 오늘날 휘황찬란한 여의도다. 2021년 이 노래가 은피리를 통과하는 청아한 목소리의 주인공 가수 신미래의 목청으로 다시 불리면서 대한민국을 감흥 물결로 일렁거리게 한다.

밤 깊은 마포종점/ 갈 곳 없는 밤 전차/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 강 건너 영등포에/ 불빛만 아련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린들 무엇 하나/ 첫사랑 떠나간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저 멀리 당인리에/ 발전소도 잠든 밤/ 하나둘씩 불을 끄고/ 깊어 가는 마포종점/ 여의도 비행장에/ 불빛만 쓸쓸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생각하면 무엇 하나/ 궂은비 나리는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가사 전문)

<마포종점> 노래의 근현대사적 키워드는, 전차·마포종점·영등포·당인리발전소·여의도 비행장이다. 태백산 검룡소에서 발원하여 490여㎞, 1200리를 유장하게 흐르는 한강 물결을 중간에 두고 남과 북으로 마주한 마포와 영등포의 서정을 담은 노래 중 이에 비할 노래가 있으랴. 그 당시 강북 뭍에서 강남의 뭍을 이어준 수단은 나룻배였다. 마포종점 전차에서 내린 두 연인은 한 사람이 나룻배를 타고 영등포로 건너가면서 이별을 한다.

노랫말의 모티브는 이렇다. 작사가 정두수(1937~2016)가 이승에 남겨 두고 떠난 인터뷰 내용이다. ‘당시 마포종점에 있는 설렁탕집은 예술인들 사이에 꽤 유명했다. 어느 날 설렁탕집 주인에게서 마포종점에 살던 두 연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미국 유학을 가 있던 남편이 과로한 나머지 뇌졸중으로 쓰러져 생을 마감하자, 졸지에 남편을 잃은 여인은 늦은 밤이면 신혼 초 사글셋방에 살던 마포종점으로 나갔다. 그곳을 미친 듯 배회하며 기다렸지만 세상을 떠난 남편이 돌아올 리가 만무했다. 1966년 여름, 나는 궂은비를 맞으면서 마포 전차 종점에 나가 마지막 전차를 기다리던 애절한 두 연인의 슬픈 사랑을 담은 노래 시를 썼다.

’당시 정두수가 일하던 지구레코드 공사는 수도극장과 명보극장이 있던 스카라 계곡, 하지만 박춘석·이미자·하춘화·차중락·남진·나훈아 등은 설렁탕집(마포옥)을 아지트로 삼았단다. 마포는 당시 변두리였는데도 전차 때문에 교통이 편리하여 설렁탕집이 많았단다. 이 노래를 녹음할 당시 큰 방울 박애경은 만삭이었다. 1964년 이미자가 <동백아가씨>를 녹음할 때와 현미가 <떠날 때는 말없이>를 녹음할 때와 같은 상황. 역시 ‘만삭에 녹음한 노래는 히트한다’는 당시 속설은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우리나라 도로 위를 달리는 전차 첫 운행은 1899년 동대문에서 경희궁을 거쳐 흥화문까지 개통한 동대문~서대문 구간이다. 이후 청량리에서 마포까지 연장되었고, 1968년 11월 30일 전면 운행을 정지한다. 그때 마포종점은 지금의 마포대교 북단 불교방송국 근처에 있었다. 당시 전차는 40인승 차량 8대와 황실 전용 귀빈차 1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인리 화력발전소는 서울화력발전소다. 마포구 당인동에 있으며, 국내 최초 화력발전소로 1929년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착공하여 1930년 준공했다. 당인동(唐人洞)은 명나라 군대가 진을 치고 있었던 곳으로 중국인을 당나라 사람, 당인이라 부른 데서 유래했단다.

여의도 비행장은 1916년부터 1958년까지 사용한 공항이다. 이후 공군기지로 쓰이다가 1971년에 폐쇄되었다. 건설 당시는 고양군 용강면(여의도), 1953년 국제공항으로 승격되었고, 1958년 민간공항 기능을 김포군 양서면(강서구) 김포국제공항으로 이전하며, 1971년 공군기지 기능도 성남 공군기지(서울공항, 공군 제15 특수임무 비행단)로 이관한다. 1922년 12월 10일, 한국인 최초 비행사 안창남이 이곳에서 시범 비행을 했다. 1997년 마포구 도화동 어린이공원에 <마포종점> 노래비가 세워졌다. 노래 발표 30년 만이다. 패티김의 <서울의 찬가> 노래비에 이은 서울의 두 번째였다.

마포(麻浦)는 삼개로 불렸던 포구 이름을 한자명으로 한 데서 유래한다. 노래 속의 여의도(汝矣島)는 용의 입에 물고 있던 여의주(如意珠)에서 유래한 여의도(如意島) 지명이 아니다. 섬의 별칭은 양화도·나의주섬·하중도로 불렸으며, 현재 국회의사당 자리인 양말산(養馬山)은 홍수에 잠길 때도 머리를 살짝 내밀고 있어서 나의 섬·너의 섬으로 불렀는데, 이것이 한자 화 되었단다. 이 산의 높이는 50여m, 이곳을 중심으로 한 여의도는 조선시대 말 목장을 하였다. 여기서 유래한 이름이 양말산이다. 오늘날 지명 여의도의 여는 너 여(汝), 이순신 장군의 호 여해(汝諧, 너로 인하여 평화로운)와 같은 글자다.

은방울자매는 1954년경부터 각각 활동을 시작하여 1962년에 여성듀엣을 결성하였다. 박애경은 1956년 <한 많은 아리랑>으로 데뷔하여 영화 <가거라 슬픔이여> 주제가 <재수와 분이의 노래>로 인기를 얻었고, 김향미는 1959년 <기타의 슬픔>으로 데뷔하여 영화주제가 <스타탄생>을 불렀다. 둘은 극장 쇼 무대에서 콤비로 부르는 노래가 좋은 반응을 얻자, 당시 일본에서 인기가 많았던 고마도리 듀엣 자매를 롤모델로 삼아 듀엣을 결성한다.

큰 방울 박애경은 본명 박세말, 1937년 밀양 출생으로 부산에서 성장하였으며 부산여상 3학년 재학 중 국제신문사가 주최 콩쿠르에서 2등을 했다. 이때 심사위원 이재호에게 발탁되어 1956년 무적인 작사 이재호 작곡 <한 많은 아리랑>으로 데뷔했다. 박애경은 그 후 방운아와 듀엣으로 <재수와 분이의 노래>를 불렀다. 작은 방울 김향미 역시 1938년 밀양 출신 김영희다. 그녀를 스카우트 한 예술가는 백영호. 1959년 백영호 작곡의 <기타의 슬픔>으로 데뷔했다. 1962년 손인호와 듀엣으로 <울고 간 단심>을 불렀다. 당시는 미국의 앤드루 시스터즈나 맥과이어 시스터즈를 모델로 한 김시스터즈·이시스터즈·김치캣·정시스터즈 등 걸 그룹이 유행했다. 이중 트로트풍 걸그룹은 은방울자매가 처음이었다.

은방울자매는 1963년 김영일 작사 송운선 작곡 <쌍고동 우는 항구>를 첫 앨범으로 냈다. 이들은 작은방울이 1981년 LA로 이민을 가자 멤버가 오숙남으로 교체됐다. 오숙남은 1958년 대히트한 <여인 우정>을 부른 신해성의 부인이다. 이렇게 대중들과 소통하던 그들은 2005년 박애경이 향년 67세로 작고 한다. 선들바람이 한강 물결을 졸랑졸랑 나부끼게 하는 마포 강변에 가면 혹여라도 희미한 옛사랑을 마주할 수 있을까. 강 건너 영등포에 하늘을 찌를 듯한 건물들 네온싸인 찬란한데.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유행가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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